음악이야기

60-70년대 문화한량들의 원더랜드'르네쌍스'

후조 2015. 7. 16. 00:25

 

 

문학수님의 저서 <아다지오 소스테누토>에 대해서 올린 글을 보고

많은 분들이 그 당시의 '필하모니'나 '르네쌍스'의 추억을 말씀하시네요.

 

어느 분의 댓글로 '필하모니'는 1982년 쯤에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고

궁금했던 '르네쌍스'는 1987년에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는 소식을

조블의 바위님께서 알려주신 사이트에서 김갑수님의 글을 통해

자세히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바위님!)

 

시인이며 문화평론가이신 김갑수님의 <문득 돌아본 '그 때 그 곳'>,

 

김갑수님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당시 '르네쌍스'의 유일한 종업원 누나 미스 양이 가져다 주는

"걸레를 쥐어짠 듯한 원두커피"(ㅎㅎ)를 마시며 "랭보의 뒤를 이을 조숙한 천재소년"이

17살의 까까머리로 담배를 피우며 베토벤, 브람스, 차이콥스키 등 음악을 들으며

한쪽 구석에서 대학에 갈 수 없을 정도의 나쁜 학교성적때문에

슬퍼서 숨죽여 꺽꺽 울다가 설움이 복바쳐 눈물을 철철 흘렸다는

문학소년 김갑수...ㅎㅎ

 

그 때 그 '르네쌍스'에 대한 글이 어찌나 맛갈나고 재미나는지

역시 추억은 아름답고 그리운 것이네요.

 

 


김갑수님의 작업실이자 예술인들의 문화살롱역활을 하는

음악감상실 줄라이홀(image from internet)

 

 

당시 문학소년이었던 김갑수님...대단한 필력을 자랑하며

시인으로, 문화평론가로,

작가나 예술가들의 사랑방역활을 하는 그의 작업실로도,

유명해지신 분이더군요.

(제가 몰라도 너무 모르죠? ㅋㅋ)

 

간직하고 싶은 글을 가끔 스크랩은 하지만 포스팅으로 올리지는 않는데

그 당시를 그리워하시는 많은 분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이미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여기에 김갑수님의 글을 올립니다.


 

지금 서울에는 '필하모니'나 '르네쌍스'와 같은

클래식 음악감상실은 이제 없는지...

 

 

 *****

 


<문득 돌아본 '그 때 그 곳'>

쓴 커피와 브람스 선율… 60·70년대 문화한량들의 ‘원더랜드






추억은 비린내가 난다.  비에 홀딱 젖어버린 외투에서 풍기는 그 큼큼한 물비린내,

혹시 추억에도 맛이 있다면 그것은 아린 맛이다.

혀의 감각을 넘어 몸 깊숙이 느껴지는 약간 아픈 통감 같은 것,

현재의 삶이 팍팍하거나 막연한 불안이 엄습할 때

지나간 추억의 아프고 비리고 아린 느낌이 위로가 되는 것은 왜일까,

추억에 닿는 일은 흡사 따끈하게 덥힌 온돌에 몸을 누이는 것과 같다.

 

 

인터넷에서 '르네쌍스'를 검색하면 문예부흥 대신 꽤 많은 분량의 추억담이 사이버 공간을 떠돈다.

그 글을 쓴 사람들은 죄다 늙었고 어린 날 자신의 문화적 허영기를 귀여워하며 기억을 되새긴다.

세계사의 '르네상스'가 아닌 추억담 속의 그 옛날 '르네쌍스'는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다.

1960, 1970년대 지금의 홍대앞이나 강남역 사거리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

서울 무교동과 종로1가인데 그 한복판에 고전음악 감상실 르네쌍스가 있었다.

통상 줄여서 '쌍스'라고 불렀던 그곳에는 언제나 지친 표정의 주인장 박용찬 선생이

드문드문 얼굴을 비치며 곡 해설을 했고 유일한 종업원 미스 양 누나가

걸레를 쥐어짠 듯한 원두커피를 무릎에 놓아주고 갔다.

걸레 짠 물을 마시며 베토벤, 브람스, 차이콥스키를 듣던 사람들은

식물처럼 조용하고 음울해 보이고 차림새가 우중충했다.

 

내 기억 속의 그곳은 세련된 문화살롱이 아니라 세기말풍 데카당스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미 인생이 아프거나 장차 아플 태세가 역력한 문화한량들이 

달력과 시계를 내던져 버린 듯 '하냥' 죽치고 세월을 보냈다.

저 자는 도대체 뭘 먹고 살아갈까 싶은 인간이 뜬금없이 미국유학을 간다고 인사를 한다거나

대기업 취업소식을 전하면 멍한 기분이 들고는 했다.

세상을 버릴 듯이 심각한 표정을 연출했지만 또 어떻게든 살아갈 도리를 하고야 마는 방황기 인생들의 집합처,

르네쌍스는 막 성장통이 시작된 신생국의 청년들이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자아팽창,

자아 정체감의 혼란을 감당하지 못해 웅성이던 상징공간이었다.

 

 

지금 르네쌍스는 역사가 되어 서초동 국립예술자료원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예술을 사랑하던 궁핍한 한량들은 사라지고 유흥객들만 흥청거리는 분위기로 세상이 변해 버린 탓이다.

텅 빈 감상실을 유지할 수 없어 몇 차례나 문을 닫으려는 시도 끝에 지난 1987년 마침내 영원히 종언을 고했다.

감상실을 채웠던 수천 장의 LP, SP 원반들과 하츠필드 스피커, 매킨토시 앰프가

덕수궁을 거쳐 서초동 예술자료원에 놓이게 된 내력이다.

그 출발점에서 최후까지 호남 출신의 부잣집 도련님 박용찬이 있었다.

 

 

그는 1951년 전쟁의 와중에 대구 향촌동에 최초의 르네쌍스를 열었다.

'전쟁의 페허 속에서 바흐가 들린다'며 외신이 놀라움을 전했다는 그 장소다.

피란을 가면서도 트럭에 음반만 싣고 떠났다는 철없던 그 청년의 르네쌍스 전설을

본격적으로 꽃피운 것이 1959년 종로 1가 영안빌딩 4층 르네쌍스 시대의 개막이다.

그 시절 서구예술은 유럽과 미국이라는 공간적 거리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아련한 환상의 원더랜드 같은 곳, 그러나 허리우드극장에서 감상하는 할리우드 영화와는 

품격이 다르다고 믿는 정신적 허영쟁이들이 르네쌍스의 좌석을 메웠다.

카뮈의 '전락'이나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옆구리에 낀 이들에게

바흐, 베토벤의 선율은 전존재를 뒤흔드는 위력이 있었다.

 

 

울었다는 사람이 많았다.  처음으로 차이콥스키의 비창 교향곡을 들으며 

너무 슬퍼서 눈물이 철철 흘러내렸다는 고백이 있었고 일생토록 브람스 음악만을 듣겠노라는 순정파도 있었다.

소련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에는 '혁명'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어

마치 위험한 거사를 벌이듯이 술렁거리는 분위기 속에 곡이 흘렀다.

실제로 '혁명 교향곡'을 틀 때는 출입구에 보초가 섰다.

겉멋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진지한, 그러나 지금 기준으로 보면 소박하고 변방적인 문화적 식견이 실내에 떠돌았다.

르네쌍스의 식물들은 팝과 록을 듣던 아래층 무아다방, 희다방에 절대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나의 르네쌍스 출입은 1974년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된다.

문예반에 들어갔는데 교지, 신문, 문학발표회, 시화전, 백일장 등 연간 6개의 학교행사를 문예반원들이 다 주관했다.

지도교사의 간섭을 수치로 아는 전통이 있었고 학교에서도 내놓은 자식 취급을 해줬다.

도대체 수업시간에 들어가 본 것이 얼마나 되려나, 성적은 더 내려갈 곳이 없었고

집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밥상이 엎어지는 불화의 연속이었다.

 

 

거북이라 불리던 문예반장 형이 어떤 오후에 담배를 피우자며 종로통으로 이끌고 갔다.  

르네쌍스였다.

맨 앞자리에 머리가 긴 청년과 조금 나이 먹은 아저씨 두 사람이 거센 에너지를 뿜으며 지휘를 하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곡의 흐름과 손동작이 착착 맞았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곳이 있다니!

그때 나는 클래식 음악이란 걸 처음 들어봤다.

무엇보다 플레이어라고 부르는 유리박스 안의 DJ가 진짜 예술가처럼 보였다.

집 장롱보다 커보이는 양 스피커 가운데 화분을 겸한 하얀 조각물이 있었고 그 앞에 칠판이 있었다.

곡이 끝나면 플레이어가 분필을 들고 나와 긴 곡, 막간의 짧은 곡, 또 긴 곡, 이렇게 세 곡을 써놓고는 했다.

쵸핀으로 읽은 작곡가는 쇼팽(CHOPIN)이었고

카잘스라고 알고 있던 첼리스트를 이곳 사람들은 한결같이 '캇싸알스'라고 발음했다.

여러 고교 문예반이 모이는 문학회의 여학생 '맑음이'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마침내 예술의 향기를 맡고야 말았노라...'

 

 

그 시절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남들에게 들킬세라 숨죽여 꺽꺽 울었던 것은 다름아닌 나였다.

랭보의 뒤를 이을 조숙한 천재시인인지라 일찍 죽을 운명임에는 틀림없지만

절대로 대학에 들어갈 수 없는 학과성적이 서러웠다.

대책없는 가정불화는 끝이 없었다.

설움이 복받쳐 홀로 눈물을 철철 흘리던 음악감상실 속의 담배 피우는 까까머리 소년,

그윽하게 '죽음', '존재', 뭐 이딴 소리를 흩날리던 자가 열 일곱 살 고교 1학년생이었다니!

그때 그 눈물의 사운드트랙이 브람스 4번 교향곡 1악장이었고

영원히 나만의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

그 후 몇 십년이 흐르는 동안 취향도 기질도 신세도 변해갔지만

브람스를, 아니 클래식 음악의 손아귀를 벗어나 보지 못했다.

골프장도, 강남 룸살롱도 가본 적이 없다.  그런 건 시시해 보여서였다.

 

 

1970년대 당시 르네쌍스의 맞수가 있었다.

명동에 소재한 필하모니, 필하모니는 우선 휴게실이 따로 있었고

헤드폰으로 개인 감상을 할 수 있는 시설도 있었다.

무엇보다 주감상실이 훨씬 넓고 화려했다.

우중충한 르네쌍스에 비해 여러모로 세련된 감상실이었는데도

그곳 출입을 일종의 배신으로 여기는 진종 '쌍스파'가 꽤 많았다.

(나중에 르네쌍스도 내부공사를 해서 휴게실을 만들었는데 영영 이전 분위기로 돌아가지 못했다.)

쌍스파들끼리 기수를 정해 저녁이면 청진동 국밥집을 전전했는데

한결같이 빈털터리였건만 어떻게 밥값을 조달하는지 신기했다.

나와 같은 또래 기수들이 어느 겨울날 대성리로 나들이를 다녀온 기억이 새롭다.

그때 우리는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아마도 경희를 사랑한 병주의 고백을 들었겠지?

 

문화는 때로 장소와 물건의 기억이다.

우리는 지난 30여년 동안 그 기억을 부수고 아파트와 고층건물을 지어 올렸다.

그 덕에 몹시 배가 부르고 해외여행을 무시로 다니게 되었지만

청소년들은 자꾸만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아기들은 잘 태어나지 않고 모든 세대가 불안에 잠식당한 영혼으로 산다.

삶이란 어찌 이리도 쌤쌤이더냐,

속성으로 달성한 풍요와 거침없는 반문화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미화된 옛날 이야기로 현재의 삶을 비하하는 것이 늙은이들의 습관이라면

차라리 늙은이가 되고 말겠다.  왜 그러한가.

문화예술에 대한 존중, 열망, 선망이 죄다 사라지고 가격만 남아버린 탓이다.

오로지 잘 팔리는 것만이 살아남고 어디선가 고독하게 자기세계를 추구하는

예술행위는 거리의 돌맹이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르네쌍스다.

괴로운 성찰과 벅찬 감동이 살아서 자아가 널뛰기하는 공간,

가격 대신 멋이, 능력보다는 진실이 존중받는 공간,

백년 이백 년 전 예술가의 고뇌를 오늘의 호흡으로 일치 시킬 수 있는 초시간적 공간,

지금 이 세상 어딘가에 르네쌍스는 없는가.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



 
 



Johannes Brahms (1833-1897) Symphony No. 4 in E minor, Op. 98

Carlos Kleiber가 지휘하는 비엔나 필하모니 (Wiener Philharmoniker)의 연주입니다.

 


위의 글에서 김갑수님은 브람스 교향곡 4번이

그의 영원한 레퍼토리라고 말하고 있고

문학수님은 그의 저서에서

"낭만의 끝자락에서 고집스럽게도 고전을 동경하며 고집했던,

개인적 내면의 세계로 침잠한 남자,

클라라의 주변을 서성이며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던 남자,

베토벤이라는 거대한 벽을 바라보면서 수 없이 좌절했으며

고전과 낭만의 이분법을 뛰어넘었다는 칭송과 더블어

절충주의지라는 비난을 함께 받았던 브람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브람스는 4편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1-3번까지는 베토벤의 교향곡과 비교되어 '베토벤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다고 하는데

마지막 교향곡 4번에서는 베토벤의 영향을 벗어난 듯

무겁고 내성적이고 체념에 가까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필하모니'나 '르네쌍스'에 대한 추억을 돌아보시면서

감상하시기를...

 

 

고전음악감상실 르네쌍스...

사실 아무리 클래식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들

트리오는 그 당시 온 세상을 다 산 것같은 모습을 한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던 컴컴하고 묘한 분위기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어울리지도 못했던 소심한 범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냥 그 시절이 그리워 언제 서울에 나가면

그런 곳에 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어느 블로거님이

지금처럼 인터넷세상에 그런 곳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냥 추억으로나마 곱게 간직하시라고....ㅋㅋ

 

생각해보니 그런 곳에 간들

베를리오즈의 헤리엣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듯이

나의 환상은 질그릇처럼 쉽게 깨어질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참 철들지 못한... 트리오입니다.

 




 

그런데 다움의 카페 음악정원의 조상사님이라는 분이 여지껏 간직하고 계신

1971년 11월 10일자 음악감상실 르네쌍스 입장권(감상권) 사진을

올려주셔서 여기에 올려 둡니다. 입장료가 30원쯤 한 것으로 기억하신다고하네요.

참 꼼꼼하신 분이시네요.  40년 넘도록 르네쌍스 입장권을 간직하고 계시다니...

감사합니다. 조상사님!

 


 2013/04/08 14:29 조선닷캄에 올렸던 글입니다.

 

 

 


바위

트리오님의 정성과 낭만이 가득 담긴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퍼온 글'이라기 보다는 앞 뒤에 자로 잰 듯한 촌평까지 넣어주셔서 전혀 새로운 글을 대하는 느낌이었네요.

게다가 제가 참 좋아하는 유진 올먼디 지휘로 브람스의 4번 교향곡 1악장까지 듣게 되니 참으로 행복한 밤입니다.
물론 연주는 관악기가 으뜸이라는 필라델피아교향악단이겠지요.
요즘은 올먼디의 연주 구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지금 밖에는 촉촉히 대지를 적시는 봄비가 내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평안하세요.  2013/04/08 22:11:39  


trio

퍼온 글을 포스팅으로 올리는 일은 처음이네요.
이 분의 글이 하두 맛갈나서...구글 검색해서 조금 더 읽었습니다.
바위님의 음악에 대한 글도 진솔하고 재미있어서 즐겨 읽고 있는데
클래식을 사랑하는 이런 분을 만나면 괜히 반갑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요즘 미국은 불경기로 문화계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모든 장르에서 다 그렇지만
오케스트라도 몇몇 유명 오케스트라를 제외하고는
유지하기 조차 몹시 힘들다고 하네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도 아마 유진 올먼디가 지휘자로 있을 때
가장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직도 그 오케스트라의 자부심은 대단하지만...

감사합니다. 바위님, 건강하세요.
 2013/04/09 01:20:20  


흙둔지

르레상스는 50~60대 나이대에 조금이라도 클래식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아마 모르시는 분들 없을걸요~?
지금도 기억나는건 매케한 담배연기와
앞에 앉아 지휘자를 흉내내던 광기어린 매니아들입니다.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다는 생각입니다.
끝으로 김갑수씨의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란 책 추천해 드리고 싶네요.
 2013/04/09 05:11:03  


trio

그 당시 르네상스같은 고전음악감상실에는
여학생들이 앉아 있기에는 너무 어둡고 우울하고 퇴폐적인 분위기였지요.
여학생들 보다는 주로 남학생들이 그것도 온갖 고뇌를 다 안고 있는 것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그저 옛날 생각이 나서...

문학수님이나 김갑수님 같은 50대의 클래식 마니아들은 많이 있는 것같은데
40대나 30대에도 그런 클래식 마니아들이 있을까요?

아무튼 이분들의 책이 너무 재미가 있어서
김갑수님의 책도 구해서 읽어야 겠네요.
그 분도 여러권의 책을 내셨든데 "텔레만..." 구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둔지님!
 2013/04/09 06:11:26  


 

 


 

둠키: 13.04.07. 2)43

검은 장막같은 커튼을 열면 어두워서 보이지않던 시야가 서서히 걷혀가고 

크고 장중한 검은 스피커는 이런 브람스를 포효하고 있었지요. 

검게 염색한 군인 작업복을 유행병처럼 입고다니던 시절, 

나중에야 알았지만시대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하더군요.

세상 고뇌를 몽땅 둘러젖어드는 비애와 위로 그리고 드높은 이상향을 꿈꾸며 

기나긴 시간을 모자란듯 삭히고 있었지요.

소개하신 글 구구절절 동감으로 받아들입니다.

숨겨놓고싶은 4번, 동질의 나그네들 반갑습니다.첼로님 수고하셨습니다. 


┗  cello911 13.04.07. 23:13
둠키님, 사실 그 당시 저는 너무나 소심한 범생이어서 
그러한 분위기에 자주,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던 것같아요.
그저 맛만 본 기억조차도 희미해서 추억의 항아리에서 퍼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서울에 나가면 그러한 곳에 가고 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지금은 그런 고전음악감상실이 없나요?
있다고 해도 그런 모습은 아닐테지만...
왜 이리도 옛날 생각만 하는지...나이탓?인가봅니다. ㅎㅎ
 
둠키 13.04.07. 23:30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도 한 시대의 산물이었듯이 
종로의 그것도 한 점이었어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요.
CD와 인터넷으로 이제는 그런 분위기의 고전 음악감상실은
종말을 고했지요. 그러나 대신 싸이버상의 음악 듣기와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 시대 변화의 산물인듯 합니다. 예전의 그 감상실에서는
이방인들 끼리의 개방된 대화의 공간은 없었던 듯 합니다. 
소심한 범생님 별 풍파도 없으셨을 듯 합니다. 
그 모습대로 곱게 지내시면 됩니다.
아! 정말로 오늘은 브람스로 채워지는 시간,
베토벤을 한 계단 상승한 광채가 있습니다. 
혹시 을지로의 애플, 이대 앞의 음악실 아시나요. 이름을 깜빡,
┗  cello911 13.04.07. 23:57
저도 위의 답글을 쓰고 나서 막상 그런 곳에 지금에야 간 들 환상은 깨어지고
오히려 가지 않은 것만 못할 것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베를리오즈의 여배우 헤리엣에 대한 환상처럼...ㅎㅎ
참 인터넷 세상이 편리하지요. 원하는 음악을 얼마든지 골라서 들을 수 있으니까요.
블로그를 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을지로의 애플은 모르겠고 이대 앞의 음악실...이름은 생각나지 않네요.
수년전 서울 방문시 이대 앞에 가 보니 전혀 예전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ㅋㅋ
 
cherish 13.04.08. 08:59
긴 댓글들 참 재미있어요
역시 추억은 아름답습니다
음악을 듣고 있으니 영화 클라라의 장면들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감사합니다
┗  cello911 13.04.08. 12:31
제가 철이 없지요? 옛날 생각만 하고...
그런데 김갑수님 아세요? 너무 재미있는 분같아요.
자기만의 음악감상실을 가지고 있다고 하네요.
인터넷 검색해보니...물론 글쓰시는 분인데...글이 너무 재미있더군요.
 
조상사 13.04.19. 11:52
그시절의 르네상스의 입장권(차권) 입니다. (30원이었나,..) 너무 깊이 소장하다 ..어데 뒀나 
한참 난리를 친적도 있었지요.<1971년11월10일 자입니다.>
┗  cello911 13.04.19. 06:44
어머나, 40년 이상 간직하고 계시다니...대단하십니다.ㅎㅎ
사진을 카피하려고 했더니 금지네요. ㅋㅋ
┗  조상사 13.04.19. 11:54
어데를 만져야 , 풀리는지,...
┗  cello911 13.04.19. 14:23
제 글의 복사를 허용하니까 카피가 되네요.
감사합니다. 조상사님! 귀한 것이네요.
┗  둠키 13.04.20. 06:49
그리운 티켙 보니 반갑군요. 저 하프가 왜 그리 멋있었는지
색갈은 더 환한 핑크 색으로 알고 있는데 세월따라 색도 변할까?
그 티켙은 문화재인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  cello911 13.04.20. 10:15
저도 포스팅하다가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참 유익한 사진이지요?
40년도 더 지난 티켓을 지니고 계시다니 조상사님도 대단하세요.
 
조상사 13.04.28. 09:50
가상타 , 이르시니 , 고맙습니다. 지니길 잘 했군요.
┗  cello911 13.05.01. 20:34
정말로 아무리 생각해도 그 조그만 입장권을 그토록 간직하시고 계셨다는 것이 기가 막힙니다.
블로그를 하면서 가장 잊지 못할 일이 되었습니다. 조상사님! 건강하세요.
┗  조상사 13.05.02. 13:27
새삼감사합니다. 첼로님.
 
carrot 13.06.04. 16:02
2시간을 들어도 좋군요.....
 
화려한 13.07.23. 17:23
저도 고3학년 시험끝나고 겨울 부터 다녔지요
음악 감상전에 무슨곡인지 작은 칠판에 분필로 써서 볼수있도록 해주었지요
그래서 그림 전공한 저도 참 잘갔고 친구들과명동에서 만나도 명동에 고전음악 감상실도 잘갔지요
을지로입구의 아폴론가 하는음악 감상실도 드나들고
그시절 그때는 LP 판으로 감상했지요
저도 아직까지 LP판 100여장 이상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네요
음향기기도 마란쯔로 사서 감상했는데
마란쯔 지금까지 쓸수 있는데
사람드ㅡㄹ은 마란츠 팔면 십만원도 안된다 하는데
전 그걸 돈으로 환산 한다든가 그러고 싶지않고
아직까지도 쓸수 있음에 가지고 있는건데
몇십년된 물건 하루 아침에 어디로 보내고 싶지는 않지요
위 글을 보니 참으로 추억여행을 제가 하고 있는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화려한 13.07.23. 1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