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로 환상적인 베네치아는 역시 이야기거리가 많은 것같습니다.
<사계, The Four Seasons>의 작곡가, 바로크 음악의 작곡자, 당대에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베네치아의 빨간 머리 신부"라는 별명(The Red Priest)의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1678-1741)가
베네치아 태생이지요.
그러므로 산 마르코 광장을 중심으로 걸어다니다 보면 비발디의 작품을 연주하는 컨서트를 알리는 포스터를
곳곳에서 보게 되어 비발디의 고향이 베네치아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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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마르코 광장에서 두칼레 궁전이 있는 곳으로 가다가 왼쪽 편의 탄식의 다리를 지나면
로간다 비발디 호텔이 보이고 그 옆으로 피에타 성당이 있습니다.
비발디는 가난한 가정에서 조산아로 태어나 허약한 체질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부모는 그가 사제가 되기를 원해서 그는 15세에 수도원 생활을 시작했고
25세에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의 머리는 유난히 붉고 아름다워서 사람들은 그를 "빨간 머리 신부, The Red Priest"라고 불렀는데
오늘날까지 그의 대명사가 되고 있지요.
원래는 이발사였지만 바이올린 연주에도 뛰어나서 지방의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활동한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는 등 음악을 들으며 자란 비발디는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사제가 되었지만 몸이 약하고 천식이 있어서 기도문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던 비발디는
사제역 대신에 라 피에타 성당의 부속기관(Ospedale della Pieta)인 고아들을 가르치는
고아원의 음악교사로 임명을 받아서 고아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만들어
30여년동안 그들을 가르치며 매주 일요일마다 공개 컨서트를 하였습니다.
그곳에 있는 고아들은 대부분 당대 부유층 유력 인사들의 사생아들이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 부모들이 신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고아원에 많은 기부를 하여 풍부한 재정으로
이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는 수준이 상당히 높아서 유럽에 널리 알려져 당대에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에게는
고아들의 컨서트를 관람하는 것이 관광코스였을 정도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비발디는 이 고아들의 오케스트라를 위해서 400여 개의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비발디의 작곡을 듣다보면 비슷비슷하게 느껴지는 곡이 많아서
20세기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똑같은 곡을 400번 쓴 것이 아니냐고 비꼬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쓴 소네트가 붙어있는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는 초연 때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고
특히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비발디의 열렬한 팬이어서 그의 신하들은 이 곡의 "봄" 악장만으로 특별 연주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협주곡 외에도 50 여편의 오페라도 작곡한 비발디는 그의 제자이며 프리마돈나였던 여성 소프라노 안나 지로(Anna Tessieri Giro)와
이복 언니 파올리나(Paolina)와 함께 비발디의 연주여행에 동행을 하는 등 가까워지자 세간에서 그들의 관계를 의심하게 됩니다.
사제로서 안나 지로와의 관계가 의심을 받게 되자 이에 화가난 추기경이 1737년 갑자기 오페라의 지휘를 맡은
비발디와 안나의 출연을 금지시킴으로 오페라는 완전히 실패하고 깊은 상처를 받은 빨간 머리 신부는
1740년 안나와 파올리나와 함께 이태리를 떠나 그를 후원하던 카를 6세 황제가 있는 비엔나에 갔지만
황제는 그가 도착한 후 얼마되지 않아서 죽어서 비발디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비발디는 생계를 위해 작곡을 하다가 그 이듬해 폐렴으로 외국땅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그의 생전에 출판된 곡은 거의 없고 거의 200년 후인 1920년 대 부터 그의 작품이 별견되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오늘날 그의 오페라 곡들이 거의 상연되지 않는 이유는 그의 오페라에 카스트라토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성 가수의 활동을 용납하지 않았던 당시의 비인간적인 시대의 산물인 카스트라토,
변성기 이전의 소년을 거세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소리, 여성의 소프라노와 남성의 성량이 합쳐진
오묘한 음색의 카스트라토는 높은 개런티를 받으며 오페라를 즐기는 이태리 사람들에게 대단한 인기가 있어서
1700년대 중반에는 이태리에서 매년 4천여명의 소년들이 거세되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카스트라토, Alessandro Moreschi(1858-1922)
(image from wikipedia)
물론 이 악습은 법으로 금지되어 1922년 사망한 알레산드로 모레스키(Alessandro Moreschi: 1858-1922)를 마지막으로
거세된 카스트라토는 지구상에서 사라졌지만 모레스키의 음색은 녹음으로 남아있어서 들을 수 있습니다.
한편 남성이 여성의 소프라노나 메조소프라노같은 음색을 타고 나거나
변성기 후에 훈련을 통하여 가성으로 내는 높은 소리를 카운터 테너라는 이름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세훈같은 가수를 Counter Tenor, 일명 '팝페라 카스트라토'라고도 부르는 것이 그러한 이유입니다.
역사적으로 마지막 카스트라토인 모레스키가 부르는 구노의 '아베마리아'인데
녹음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왠지 그의 노래가 울부짖음처럼 들리는 것이 무척 서글프게 느껴집니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궁중에서 왕의 신하(내시, 환관)가 되기 위해서는 왕의 여자들과의 염문을 방지하기 위해
생식기를 거세하여야 했던 시대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인간이 참 잔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Loganda Vivaldi Hotel
피에타 성당 옆에 있는 로간다 비발디 호텔은 비발디가 평생 살았던 집인데
지금은 개조하여 호텔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베네치아에서 일박을 예정하고 이왕이면 이곳에서 묵고 싶어서 가기 전에 알아보니
우리가 가는 날짜에 방이 없어서 안타깝게도 비발디가 살았던 집에서의 숙박은 포기해야 했습니다.
로간다 비발디 호텔 앞의 상인들
눈 오는 날의 산 마르코 광장 (image from internet)
흐르는 음악은 비발디의 <사계>중에서 "겨울"입니다. 비발디 자신이 이 협주곡의 소네트에서 표현한 것처럼
계절마다 특징을 잘 나타내었기에 봄에는 "봄을", 여름에는 "여름"을, 가을에는 "가을"을,
겨울에는 "겨울"을 듣고 싶게하는 음악이기에 만인의 사랑을 받는 곡인 것같습니다.
내 기억 속의 내 고향은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은 오히려 포근하였습니다.
그런 날 해질 녁 커피 한잔과 함께 듣고 싶은 음악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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