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에 있는 두오모 성당
뉴욕과 파리 다음으로 세계적인 패션을 주도하는 도시인 밀라노는
이태리 북부의 최대 도시인데 이곳에서의 일정은 도착한 날 오후와 이태리 북부를 일주하다시피 돌고 나서 루체른으로 떠나는 날 한나절만 잡혀있었습니다. 명품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시간이 더 있다면 스칼라 극장에서 하는 공연을 관람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접은 채로 전날 밤 성악을 공부하는 미모의 성악가가 경영하는 한인민박에서 일박을 하고 오후에는 스위스 루체른으로 떠날 예정이어서 오전에 서둘러 관광객에게 가장 볼거리인 두오모 광장으로 나갔습니다. 이미 관광 가이드 정보에 올라와 있는 사진을 많이 보았지만
1386년 착공되어 1965년에 모든 공사가 완료되었다는 두오모 성당이 있는 광장 한 복판에 서서 광장을 삥 둘러 보니 뜨거운 태양 아래 거의 6세기의 역사를 담고 21세기의 세계인들을 불러들이는 성당의 위용에 가슴이 콩닥거리고 현기증마저 일어나면서 250 여년의 역사 뿐인 미국이 왜 그리 민망하고 서글프게 느껴지는지, 유럽인들이 미국을 경시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습니다. 우선 광장 복판에 서서 두오모 성당을 사진기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누군가 내 손에 옥수수를 한 웅쿰 쥐워 주길애 아무 생각도 없이 받았는데 받자 마자 비둘기들이 마구 달려들어 손바닥에 앉았습니다. 놀랍기도 하였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비둘기들을 열심히 사진을 찍고 나니 아까 옥수수를 건네준 사람이 돈을 요구합니다. 20유로를 달라고 했나, 아무튼 어처구니 없는 돈을 요구하는데 정말로 내 지갑에는 동전 몇 개뿐, 현금이 없었습니다. 아차, 싶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동전을 몇 개 주면서 이것 뿐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니
투덜거리면서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동전을 받아들고는 그냥 돌아섭니다.
아, 조심해야지... 깜빡 잊었네...소매치기도 많다고 했는데... 조금 놀란 가슴을 쓸며 내가 가장 보고 싶어했던 스칼라 극장 쪽으로 이동하는데, 그 유명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가 두오모 광장과 스칼라 극장이 있는 스칼라 광장을 이어주고 있었습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 1820-1878)는 19세기 중엽 이태리의 통일을 이루워 "조국의 아버지"로 존경을 받는 이태리의 왕의 이름이지요. 이 갤러리아는 건축가인 주세페 멘고니가 설계하여 1865년부터 1877년까지 13년에 걸쳐 지어진 세계 최초의 근대적 쇼핑몰인 아케디아, 현대적인 쇼핑몰에서는 볼 수 없는, 프레스코畵가 건물 위쪽에 그려져 있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바닥에 깔려있는 겔러리아는 양쪽으로 명품 샵들과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있고 아치형 유리 천장이 덮여 있어서 실내이면서도 야외 기분이 드는 환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명품상점들이 줄을 지어 있는 사이에 가장 현대적인 Fast Food의 상징인 Mc Donald가 있어서 들어가 아이스크림으로 더위를 잠시 식혔습니다. 라스베가스의 몇몇 호텔에도 인공 하늘을 한 쇼핑 몰들이 있어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찬란하지만 그러한 현대식 건물과는 전혀 다르게
우아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모습의 멋진 겔러리아였습니다. 바닥 전체가 모자이크로 되었는데 그 중 위 왼쪽의 적십자모양의 모자이크는 밀라노를 상징하고 오른쪽 황소 모양(Bull) 모자이크는 토리노를 상징하는데 이 황소를 밟으면 행운이 온다는 미신때문에 사람들이 너도나도 황소를 발뒤꿈치로 밟아서 아예 푹 파여져 있었습니다. 군중심리이겠지만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도 행운이라면 어처구니 없는 미신인 줄 알면서도 의지하려는 심리를 가진 것을 생각하니 쓴 웃음이 나왔습니다. 로마를 상징하는 늑대 모자이크와 피렌체를 상징하는 백합모자이크는 사진을 찍지 못했네요.
아케이드를 지나면 스칼라 광장(Piazza della Scala)이 나오고
광장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상이 있고 그 앞에
그 유명한 스칼라 극장(Teatro alla Scala)이 있습니다.
30세에 밀라노에 와서
인생의 절정기를 이곳에서 보냈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가 그린 너무나도 유명한 "최후의 만찬"은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에 있다고 하는데
그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무척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생략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포스팅 하나로도 부족하겠지만...
여기에서는 생략
그림을 본 사람이 말하기를 워낙 유명해서 익숙한 그림이라
실제로 볼 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유명한 그림을 실제로 보면 오히려 실망감이 큰 적도 많으니까...
그의 동상이 있는 스칼라 광장은 단연 관광객들에게 최고로 인기가 있었는데
바로 앞에 있는 스칼라 극장에 관심을 갖는 관광객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같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밀라노에서 제일 보고 싶었던 곳은
스칼라 극장이었습니다.
비록 실내는 볼 수 없었지만...
지난 200년이 넘도록 이태리를 대표하는 극장으로
많은 오페라의 초연을 담당해 온 성악가들의 꿈의 무대인 스칼라 극장...
원래 이 자리에는 밀라노의 궁정극장인 "두칼레 극장(Teatro Ducale)"이 있었는데
1776년에 화제로 소실되고 당시 이태리를 지배했던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명에 의해 1778년에 당시로는 최고의 조건을 갖춰서 다시 세워졌지만
세계 제 2차 대전때 파괴되어 1946년에 재건되어
그 해 4월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오픈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베르디의 오페라, <노루마>, <오텔로>, <팔스타프>,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 <투란도트> 등
명작 오페라를 초연하고 많은 일류 지휘자와 명가수들을 산출해 낸 역사적인 극장이지만
파리의 화려한 오페라 극장에 비하면 외관이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초라해 보였습니다.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 (image from web)
오스만 남작의 야심적인 파리의 도시계획에 따라 171개의 공모작 중에서
가르니에(Palis Garnier)의 설계로 1875년에 완공된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입니다.
무척이나 화려한 외관이 스칼라 극장과는 비교가 되었습니다.
이 오페라 하우스는
현재는 발레 공연장으로만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스칼라 극장을 보니 생각나는 사람, 다니엘 바렌보임(1942- )
아르투르 토스카니니를 시작으로 툴리오 세라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를 거쳐
클라우디오 아바도(1968-1986), 리카르도 무티(1986-2005)에 이어
2006년부터 Principal Guest Conductor를 거쳐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이 된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은
피아니스트로, 지휘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명성을 떨치면 떨칠수록 왠지 그에게
고운 시선을 주기 싫은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지만
그의 아내였던, 불치병으로 활을 놓아야 했고
끝내 남편의 외면 속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던
세기적인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의 이름이
바렘보임이라는 이름과 함께 오버랩되기 때문인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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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의 나이에 영국의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유명하게 하여 일약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재클린 뒤 프레(Jacqueline Mary du Pré: 1945-1987),
옥스포드 대학교수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플룻을 배우는 언니 힐러리 등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나타낸 재클린, 첼로를 배우고 싶다고 졸라서 배우기 시작하여 1961년에 런던에서, 1965년에 뉴욕에서 데뷰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다가 23세에 아르헨티나 출생의 유대인 피아니스트 바렌보임을 만나 뜨겁게 사랑하여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로 개종하면서까지 결혼했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물론 그들의 공연에 대한 반응이 너무나 좋아서 많은 음반도 내고 그들의 연주는 언제나 풀하우스로 탄탄하게 성공가도를 달리는 듯했지만 성공을 향하여 만족할 줄 모르는 바렌보임의 야망은 재클린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어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힘들어 하다가 다중경화증(온 몸이 굳어지는 병)이 그녀를 엄습하였습니다. 1971년 병이 시작되어 그 이듬 해 가을부터 병상에 누워있기를 17년,
그러나 병상에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접지 못하고 후배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전신마비 증세는 점점 눈도 뜨지 못할 정도 심해져서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1987년 가을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가 활발히 연주한 기간은 불과 6년, 그 짧은 기간에 그녀의 눈부신 활약으로 하이든, 보케리니, 슈만, 생상, 드보르작, 엘가 등의 첼로 협주곡을 녹음했고 실내악, 소나타, 바흐의 무반주곡 등의 음반드 남겨서 오늘날
음악애호가들에게는 물론 첼로를 공부하는 학생들과 첼리스트들에게는 거의 우상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녀가 영국의 음악가 에드워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함으로 영국인들에게는 영국의 슬픈 장미로 기억되고 있는 재클린 뒤 프레... 한편으로 재클린이 병이 들자 재클린을 떠나 다른 여자와 동거하며 재클린을 외면하고
자신의 음악에 대한 야심을 키우던 바렘보임은 여전히 승승장구...
파리 관현악단(1975-1989), 시카고 교향악단(1991-2006), 현재는 베를린 슈타츠카펠레(1992-)의 음악 감독을 겸임하며 아랍권과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을 모아 West-Eastern Dival Orchestra를 창단하였고 여러 유명한 교향악단의 객원지휘자로 음악계에서 탄탄한 입지를 굳히고 있는 가운데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도 선정된 것입니다. 반 유대주의적 성향으로 이스라엘에서는 금기시 되던 바그너의 곡을 이스라엘에서 연주하기도 하여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지금은 관계가 개선되어 2004년에는 이스라엘 국회가 수여하는 울프상의 예술부분 수상자가 되기도 했고 2011년에는 영국 명예 KBE훈장(외국인 대상 명예훈장)을 받았고 그래미 상(Grammy Awards)도 7번이나 받은 음악가 바렘보임을
제가 감히 비판할 자격도, 이유도 없지만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재클린의 일생이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워서 그를 괜스리 미워한 것입니다.
그러나 재클린 뒤 프레를 너무나 사랑하는 나머지 재클린의 장미라는 이름도 있는 영국인들이 바렘보임에게 작년에 외국인에게 주는 KBE훈장을 준 것을 보면 바렘보임을 미워하는 나의 편견을 씻어야할 것만 같습니다. 이제 벌써 올해 7순이 되는 노장인데 미워도 다시 한번... 다음에 이곳에 올 기회가 있으면 꼭 스칼라 극장에서 다니엘 바렘보임의 지휘로 연주를 감상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것으로 밀라노의 짧은 일정을 끝내고 샌드위치로 간단한 요기를 하고 서둘러 스위스의 루체른으로 떠났습니다.
베토벤의 Trio No. 7 in B flat major, op. 97 for Piano
"Archduke" <대공>의 1st movement, allegro moderato를
바렌보임과 핑커스 주커만과 재클린 뒤 프레가 연주합니다.
이 곡은 베토벤이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한 곡으로
그의 7개의 피아노트리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곡입니다.
(1969년 recording, from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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