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기다리는 편지
- 정호승-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 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
(넓고 황량하기만 한 밀밭에 있는 우체통을 보니 생각난 정호승의 시입니다.)
워싱톤 주의 동쪽에는 거대한 밀밭이 있어요.
미국에 참 오래 살았지만 한번도 가 보지 못한 곳인데
이곳에 있는 밀밭이 사진 애호가들에게 유명하다고 해서
멤버들과 벼르고 벼르다 짧은 일정의 출사를 다녀왔습니다.
미친 존재들 10명이 새벽 5시에 엘에이 공항에 모여서
7시 반 비행기를 타고 10시 경에 워싱톤 주 시애틀에 도착하니
비가 오고 있더군요. 반가운 비였지만.... 사진 찍기에는..ㅋㅋ
차 3대를 빌려서 도심을 벗어나는데 비는 계속 오고
거의 300마일 (480km)를 달리면서 유채꽃밭도 만나고..
저녁이 다 되어 도착한 곳이 Pullman 이라는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유명한
워싱톤 주립대학 (Washington State University in Pullman)이 있고
한국식당 하나가 제법 크게 있어서 이틀 저녁이나 그곳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한국학생이 약 300명 있다고 하더군요.
식당 여주인은 예쁘고 상냥하면서도 남편이 대학교수라고 하면서 제법 도도했어요.
이럴 때 속으로 쓰는 표현.. so what?
심사가 못된 후조예요. ㅎ
3박 4일의 일정인데 이틀은 공항에 오고 가고
사진을 찍을 기회는 단 이틀이었는데 날씨가 계속 흐리고
간간히 비도 뿌리고 바람은 또 어찌나 세차게 부는지
눈물 콧물이 나면서 눈이 빨갛게 충혈이 되고
밭 언덕 위에 서있는 첼로가 날라갈 것만 같았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줄도 모르고
이틀을 내내 헤메이며 사진을 찍었지요.
그저 가도 가도 넓고 끝이 없는 황량한 벌판에는 밀밭 뿐이라
일반 관광객들에게야 크게 매력적인 곳이 아니겠지만
새파랗게 결실을 맺고 있는 밀밭, 수확을 끝내고 아직 씨를 심지 않은 빈 땅,
그리고 이제 파릇파릇 싹이 돋아나고 있는 밀밭,
이 모든 것들이 낮으막한 구릉에 아울어져 만들어 낸 모양새는
Very picturesque 하다는 표현 밖에는 뭐라 형용할 수가 없는 이곳이
사진가들에게는 더 없이 인기있는 장소이지요
온 사방을 돌아봐도 인적은 거의 없고 어쩌다가 밀밭 가운데 있는 집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은 듯 쓸쓸해 보이고
경작하는데 쓰이는 트랙터를 사용하는 모습도 거의 보지 못했답니다.
일출이나 일몰은 날씨때문에 찍지도 못하고
잠시라도 해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끝내 밝은 햇살은 비추이지 않아서
'빛의 예술'이라는 사진... 별로 잘 나오지도 았았습니다.
그러나 그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하였습니다.
이곳은 사철 어느 때 오든지 다른 모습이라고 합니다.
가을 추수할 때도, 겨울 눈이 내렸을 때도...
그러나 언제 다시 올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밀밭하면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인상파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 - 1890)가 생각나지요.
그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 '폭풍우 구름 아래의 밀밭' 등 밀밭을 많이 그렸지요.
그리고 끝내는 밀밭에서 권총으로 자신을 쏘아 며칠 뒤에 생을 마감하였지요.
1890년 7월, 37세의 젊은 나이에...
아래 두 그림은 그가 생을 마감하던 해 7월에 그린 그림입니다.
까마귀가 있는 밀밭
Wheatfield with Crows (July, 1890) 50.5x103 Van Gogh Museum, Amsterdam , Netherlands(image from internet)
폭풍우 구름 아래의 밀밭 (July,1890) 50 x 100.5 cm, Van Gogh Museum, Amsterdam, Netherlands (image from internet)
고흐의 묘지 입구... 고흐의 밀밭 그림이 벽에 걸려있고 밀밭이 사진 뒤로 보입니다.
빠리 근교 오베르 쉬르 와즈에 있는 고흐와 테오의 무덤
고흐가 생애 마지막 두달을 살았던 빠리 근교 오베르 쉬즈 와르에 가면
고흐가 머물던 하숙집이 있고 고흐가 그린 오베르 교회가 있고
고흐를 돌보던 의사 가셋의 집도 있고
키가 멀쑥하게 큰 고흐의 동상이 있는 공원도 있고
마지막 총을 쏘았던 밀밭이 있으며 밀밭 옆에 있는 공동 묘지에는
고흐와 동생 테오의 무덤이 나란히... 조촐하게 있지요.
2013년 1월...
'빠리에 오지 않을래?"라는 짧게 카톡 문자를 동생에게 날렸더니
'그래, 언니, 갈께! 무조건 갈께!'라고 역시 짧은 답을 한 동생...
의사로 분주한 일상을 보내는데도 불구하고 빠리로 날라와서
우리 자매는 드골공항에서 반가운 해우를 하였었지요.
의사이지만 아마추어 화가로도 열심히 활동하는 동생이기에
우리는 추위도 아랑곳 하지않고 빠리 시내의 미술관들을 헤메고
고흐가 정신병원에 있던 남프랑스 아를에도 가고 오베르 쉬르 와즈에도 갔었지요.
마치 고흐를 찾아다니는 순례자처럼...
오베르 쉬르 와즈를 기차를 타고 찾아 갔던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겨울이라 밀밭은 텅 비어 있었고 두 형제의 무덤도 비를 맞으며
돌아가지 못한 머나 먼 고국을 그리워하는 것같았습니다.
<고흐와 테오의 영혼에 바치는 노래 2>, 장혜숙, 50호 켄바스, 아크릴과 혼합매체
<고흐와 테오의 영혼에 바치는 노래 1>, 장혜숙, 50호 켄바스, 아크릴과 혼합매체
그렇게 꿈같은 일주일을 보내고 다시 드골공항에서 헤어진 동생...
불과 며칠도 지나지 않았을 때 '고흐와 테오의 영혼에 바치는 노래'라는 타이틀의
그림 두점을 그렸다고 카톡으로 보내와서 얼마나 감격을 했는지...
"와, 너무 멋있다. 눈물이 나려고 하네.
오베르 쉬로 와즈에서 본 고흐와 테오의 무덤이
너에게 엄청난 예술혼을 부어주었구나.
어떻게 이렇게 빨리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래, 머리를 쥐어 짠다고 그려지는 것은 아니지,
역시 너는 대단한 화가다.
아마도 너는 빠리 체질인가 보다.
빠리에 자주 가야겠네.ㅎㅎ" 라고 문자를 날렸더니
"언니 평이 더욱 멋져.
정말 무덤을 보고 영감을 얻었어요.
언니의 사랑과 배려에도 감동하고..."
우리 자매는 이렇게 카카오톡으로 긴밀한 소통하였지요.
고흐와 테오가 자주 편지를 주고 받았듯이...
이미 여행기에 다 올렸던 이야기인데 밀밭 출사를 다녀오니 생각이 나서
첼로의 추억의 창고를 다시 들여다보며 이렇게 되풀이 하네요.
동생 자랑하는 못 말리는 첼로... 팔불출이예요. ㅋ
빗속을 헤메이다 돌아와서 글을 쓰다보니 뜬금없이 생각난 노래입니다.
아주 오래된 영화 '쉘부르의 우산'의 주제곡이지요?
"I Will Wait for You" 프랑크 시나트라가 부른 후에 카니 프란시스가 부릅니다.
I will wait for you for a thousand summers...
디지탈 시대... 너무나 각박한 세대에 우리들의 사랑도 메말라가는데
아직도 이런 순수하고 아련한 사랑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호승님의 싯귀절 처럼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지구촌 어디엔가에 있을 거예요.
시인의 마음을 알 듯 모를 듯 하지만요.
워싱톤 주 밀밭을 다녀와서
후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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