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너때문이야

<가을편지> 필라델피아에서

후조 2013. 12. 6. 01:15

 

 

  


가을 편지


- 고정희 -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활한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 버렸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 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


 

 

 



 

 

 


 

 

 


트리오가 좋아하는 전라남도 해남 출신 고정희 (1948 - 1991) 시인의 <가을 편지>입니다.

너무 가난하여 10대를 검정고시와 독학으로 지냈고

25살에야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신학대학 한신대)에 입학, 낮에는 여성운동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

밤에는 시와 글을 쓰며 글 쓰느 노동자처럼 살다가 지리산을 좋아한 시인은

결국 지리산 등반사고롤 43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은 가을날

시인의 마음을 동감해 봅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이 곡을 들을 것같습니다.

에바 캐시디가 부릅니다.


 

*****

 


 

 


士雄

낮에 마신 아메리카노와
두통에 먹은 진통제가 잠을 쫓아 버렸는데
트리오님의 사진과 글이 올라왔네요.ㅎㅎ

고정희님의 시도 좋습니다.^^ 2013/12/06 01:27:39  


흙둔지

고정희 시인의 짧은 생은 가을만 되면 더 안타깝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토록 좋아하는 지리산 자락에 뭍히셨으니 다행인가 합니다.

가을편지란 노래를 부른 최양숙이란 가수 아시지요?
그 분이 벌써 71세가 되었다는 뉴스를 보고는
세월의 빠름에 야속한 느낌까지 들더군요...
 2013/12/06 05:19:53  


산성

많이 편애하는
고정희 시인의 시를 올려 두셨네요.
가을 다 보내고 가을 편지 받아드는 기분.
 2013/12/10 18:2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