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
- 고정희 -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활한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 버렸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 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
트리오가 좋아하는 전라남도 해남 출신 고정희 (1948 - 1991) 시인의 <가을 편지>입니다.
너무 가난하여 10대를 검정고시와 독학으로 지냈고
25살에야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신학대학 한신대)에 입학, 낮에는 여성운동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
밤에는 시와 글을 쓰며 글 쓰느 노동자처럼 살다가 지리산을 좋아한 시인은
결국 지리산 등반사고롤 43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은 가을날
시인의 마음을 동감해 봅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이 곡을 들을 것같습니다.
에바 캐시디가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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