Český Krumlov(체스키 크룸로프)에서 쉴레를...
에곤 쉴레 미술관의 기념품 가게에서 찍은 에곤 쉴레의 그림
빠리 여행에서 세느강 가를 걷다가 천재 여류 조각가 까미유 끌러델이 살던 아파트를 우연히 만나서
감격했었던 것처럼 체코 여행에서는 민박집 주인의 권유로 프라하에서 기차를 타고 갔었던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골목길을 다니다가 우연히 에곤 쉴레의 미술관을 만나게 되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여행에서 얻게 되는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름도 생소한 체스키 크룸로프는 1992년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주 작은,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이곳에는 체스키 크룸로프 古城이 있었습니다.
프라하의 중앙역, 유럽에서 어딜가나 쉽게 만나는 우리나라 기업의 광고,
이곳에서도 현대(Hyundai) 간판을 만나니 반갑더군요.
체스키 크룸로프는 프라하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프라하의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 반 가량 가서
체스키 부데요비체라는 곳에서 다시 작은 기차로 바꿔 타고 한 시간가량 가는 곳이었습니다.
일찍 서둘러서 버스로 가면 프라하에서 당일로 다녀올 수도 있는 거리였지만
블타바 강 가의 팬션에서 하루를 유숙하기로 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기차를 탔습니다.
오랫만에 타 보는 기차, 기차역은 아주 오래 되어 낡았고 기차 또한 매우 후졌는데,
그래도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을 가던 추억이 그리움이 되어 기차역에 들어서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여행 중에 읽으려고 가지고 간 체코의 현존 작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기차 안에서 만난 체코인부부가 보고 놀란 표정을 지어서 혹시 작가에 대한 것을 모아 놓은 곳이 프라하에 있는지를
(물론 아직 생존인물이니 박물관은 아니더라도) 물었더니 없을거라고, 그가 지금은 프랑스 빠리에 살면서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는 것으로 안다고... 미국에서도 살았다는 부부는 영어를 능숙하게 하여서
소통에 불편함 없이, 나름 유익한 대화도 나누면서, 또한 비가 오락가락하여 더욱 정겨웠던 기차여행이었습니다.
체스키 부데요비체에서 기차를 갈아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작은 시골역에 내리니
비가 제법 내리고 있었습니다. 우산도 없이 10 여분을 비를 맞으며 걸어가니 아름다운 도시가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한 시간이면 시내를 돌고도 남는 아주 작은 도시입니다.
체코의 젖줄인 블타바 강이 도시 주위를 제법 빠른 속도로 물소리를 내며 아름답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 얼마만에 듣는 시원한 강물 소리인가...
예약한 팬션에 짐을 내려놓고 시내를 걸어 나갔습니다.
시내의 모든 길들은 돌을 박아서 만들어져 있고 어디에서나 세월의 흔적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곳곳에 카페들, 기념품 상점들이 줄지어 있고 서울에서 온 관광객들도 제법 많았습니다.
블타바 강 가에 있는 체스크 크룸로프 고성(古城),
프라하 성 다음으로 크고 오래된 성의 높은 성이 교회 뒤로 보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오랫만에 들어보는 정겨운 강물소리가 대서양을 건너 온 나그네의 잠을 깨웠습니다.
하늘을 찌르는 성탑,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그네의 관심을 끈 곳은 에곤 쉴레 미술관이었습니다.
이 화가의 미술관이 이곳에 있는 줄은 몰랐는데 좁은 골목길을 걷다가 그의 미술관이 눈에 띄어
그 어떤 것보다 나그네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습니다. 물론 미술에 지극히 문외한이지만 에곤 쉴레의 많은 작품들이
비엔나의 레오폴드 박물관 Leopold Museum에 있는 것만 알고 수 년전 바람같이 다녀온 비엔나에
언제 다시 가면 꼭 찾아가 보려고 생각했었는데 이곳에서 그의 미술관을 만나다니...
에곤 쉴레(Egon Leo Adolf Schiele: 1890-1918)는 뭉크, 클림트, 코코슈카와 함께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표현주의 화가로 비엔나 서쪽의 도나우 강 가의 조그만 동네 툴른에서
1890년에 태어 났고 1918년에 당시 전 세계를 죽음의 도가니로 만들었던 스페인 독감으로 인하여
아내(Edith Harms)가 죽은지 사흘 후에 그도 아내를 따라 2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불운의 천재 화가입니다.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싫어하여 그의 그림을 태워버리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후원으로 16세에 비엔나 미술학교에 들어갔고 1907년 당시 이름 높던 선배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에게
그의 드로잉을 보일 기회가 주어져서 그의 비상한 재능을 알아 본 클림트는 그를 후원했습니다.
나중에는 클림트의 모델(Valerie Neuzil)을 물려 받기도 했다지요?
그는 특히 드로잉 감각이 뛰어난 화가였는데 "그의 드로잉은 빙상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것처럼 연필이 종이 위를 달려가는 것같았다"라고 할 정도로 빠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외설적인 그림을 그린다고 기소되어 감옥에서 21일 간을 지내기도 했을 정도로
그의 그림은 외설인가? 예술인가? 라는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화가인데
체스키 크룸로프(당시의 이름은 Krumau)는 그의 어머니의 고향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한때(1910년) 이곳 어머니의 고향에 와서 전원 풍경과 아름다운 도시의 정경과 사춘기 소녀 모델들의
누드화를 그렸는데 시골 사람들이 쉴레의 생활 방식, 곧 여인들과 모델과의 관계를 못 마땅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그는 비엔나에서 35km 정도 떨어진 노이렝바하라고 하는 마을로 옮겨 갔는데 그곳에서도
주민들은 그를 적대시하였다고 하지요. 결국 비엔나와 뮌헨, 퀼른, 그리고 부다페스트에서의 전시와 함께
화가로서의 명성이 높아 가던 때에 쉴레는 모델이었던 어느 가출 소녀의 고발로 노이렝바하 감옥에
21일간 갇히고 마는데 (1912년) 죄목은 부도덕과 어린 모델을 유혹하였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위의 그림들은 미술관 기념품 가게에서 찍은 그의 그림인데 다른 그림들은 이 그림들 보다도
더 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다른 화가들은 대부분 살짝 가리는 노골적이 부분을 쉴레는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그렸다고 합니다. (더 야한 그림은 올리지 않았습니다. ㅎㅎ)
Woman with Legs Drawn Up (1917), Narodni Galerie, Prague (110 kb) (image from web)
재판 과정에서 판사는 쉴레의 드로잉 한 점을 불에 태워 일찍이 그의 부친이 쉴레에게 가한
모독감을 일깨워준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감옥살이 경험은 쉴레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어
쉴레의 성격과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후 그는 거의 철두 철미 은둔적인 생활을 하였고
자신을 수도승이나 은둔자로 그린 초상화들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래의 바짝 마른 모습의 그의 자화상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냈었나를 짐작하게 됩니다.
Self Portait (1913), pencil,
National Museum Stockholm(from internet)
Self Portrait (1914)
(from internet)
그의 외설적인 그림 보다는 그의 초상화들과 퐁경화들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림입니다.
위의 두 그림은 체스키 크룸로프 마을을 그린 그림입니다.
(기념품 가게에 있는 것을 찍은 것입니다.)
Four Trees (1917), oil on canvas, Osterriche Galerie, Vienna (90 kb)
에곤 쉴레 미순관 일층에는 기념품 가게가 있고 이층에는 그의 가족 사진들과 그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사진 찍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일층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찍은 것들입니다.
28년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쉴레는 상당히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최근(2010년 7월 26일)에
그가 그린 모델의 초상화 (Portrait of Wally) 한 점이 천구백만불에
그동안의 장물취득에 관한 고소에 대하여 합의가 되어 화재를 일으킨바 있습니다.
쉴레의 "Portrait of Wally"(1912) 모델이었던 발리의 초상화입니다. (from internet)
이 그림은 1912년에 그린 쉴레의 모델 발리(Wally: Valerie Newzil)의 초상화인데
1997년 비엔나의 레오폴드 미술관이 뉴욕의 현대 미술관(MOMA)에 대여 전시를 하러 왔다가
소유권 분쟁(장물 취득에 대한 고소)이 시작되어 그 동안 MOMA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2010년 7월 26일에 맨하탄의 법정에서 재판이 있기 전에 현 소유주인 비엔나의 레오폴드 미술관이 원래의 소유주였던,
나치 점령을 피해 런던으로 피신한 미술품 중개상 Leo Bondi Jaray의 후손들에게 일천 구백만불을 지불하는 것과
레오폴드 미술관은 이 그림을 이 전의 주인이 Leo Bondo Jaray였다는 설명서를 첨부하여
전시하라는 것을 골자로 합의하였다고 합니다.
클림트나 피카소, 고흐, 모딜리아니 등 다른 유명 화가들의 그림들이 훨씬 더 비싼 가격에도 거래되고 있지만
그림 한 점에 일천 구백만불이라니 우리같은 사람은 상상도 못할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그의 불운하고도 짧은 생애가 이런 천문학적인 그의 그림 값으로 보상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는 전쟁과 굶주림에 의한 죽음이 멈추지 않고 있는데,
또한 지금도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붓을 놓지 못하는 많은 화가 지망생들이 있을텐데
상상할 수도 없는 그림 한 점의 가격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흐르는 음악은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의
Piano Trio in A minor, Op. 50, 1악장: Pezzo Eligiaco입니다.
Piano: Anastasia Injushina, Violin: Ana Chumachenco, Cello: Alexander Baillie
이 음악은 "어느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이라는 부제가 붙은 곡으로
모스크바 음악원의 초대 원장이며 피아니스트였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죽음 후에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작곡한 곡입니다.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은 차이코프스키의 스승이었는데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B단조, Op. 23에 대하여
혹평을 하여서 둘은 별로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가 이 후 이 협주곡이 명피아니스트들의 연주로
호평을 받게 되자 루빈스타인은 차이코프스키에게 사과를 하여 둘은 화해를 하고
차이코프스키는 루빈스타인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루빈스타인이 파리에서 1881년 3월 23일에 숨을 거두자 차이코프스키는 차기 모스크바음악원의
원장의 물망에 올랐지만 사양하 고 이태리의 로마에 가서 그를 애도하기위해 이 곡을 작곡하였다고 합니다.
오늘날 이 곡은 그의 실내악곡 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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