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한 이야기

큰언니를 추억하며

후조 2018. 11. 27. 09:25





비제 (Georges Bizet, 1838-1875)의 오페라 "진주 조개잡이"에 나오는 

주인공 나디르가 부르는 아리아, "귀에 남은 그대 음성"을 들으면 

언제나 큰언니 생각이 납니다.

클래식을 매우 좋아하시던 언니의 목소리는 낮고 조금은 허스키해서

아리아를 부르기에 맞지 않을 것같지만

원어로 아리아를 부르던 음성은 달콤하고 부드럽고 너무나 멋스러웠습니다.

오페라 아리아 뿐만 아니라 이태리 가곡들도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너는 왜 울지 않고", "무정, 무정한 마음", 등을 원어로 흥얼거리시던 모습과

그 낮고 허스키한 음성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3년 전 반백년 이상을 함께 한 형부를 먼저 보내고

마음이 허전하고 외로우셨는지 아직은 이르다 싶은데 몸도 마음도

허물어지고 있었습니다.  최근 집과 병원을 오가며 투병을 하시다가

요양시설로 옮기신지 겨우 한 달 조금 지났는데 뜻밖에 비보를 어제 받았습니다.

친구들 조차도 언니의 멋과 낭만과 사랑을 아는지라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라면서 언니를 자랑스러워 하였는데

끝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언니는 시골에서 7남매 중 장녀로 태어나서 초중등학교를 다닐 때 웅변을 아주 잘했다고 합니다.

한국동란 후, 그 시대에는 반공에 대한 웅변을 학교에서 많이 시켰던 것같습니다.

1950년 대 시골에서 읍장을 출마하신 적이 있는 친정아버지의 선거유세 담당자들이

당시 중학생인 언니를 데려가서  " ***씨를 읍장으로..."라고 마이크로 외치며 

자동차로 시내를 돌며 아버지의 선거유세를 했다는 것은 우리 집안의 전설이지요.


비록 시골에서 사셨지만 어머니는 아주 교육열이 강하셔서 큰언니를 가까운 도시 전주로

고등학교를 보내셨고 당시 중학생이던 큰오빠도 전주로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 후 언니와 오빠가 서울로 대학에 진학하게 되니까 둘째 언니, 둘째 오빠, 그리고

저와 두 동생들은 전주를 거치지 않고 서울로 차례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 대, 그 당시에 시골에서 전주나 서울에 학교를 보내는 것은

지금의 외국유학이나 다름없는 일이였을 것같습니다.

큰언니가 대학에 진학할 때 친정아버님은 딸을 무슨 대학에 보내느냐고 잠시 반대하셨지만

어머니의 교육열에 계속 반대하시지 못하고 허락하셔서 언니는 이화여대 법과대학에 진학을 하셨지요.

언니가 이화여대에 다닐 당시 전교생이 4천명 정도 였다고 하는데 켐퍼스에서 플레어 스커트의 원피스를 입은

언니의 흑백사진을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 세대와는 다른, 낭만이 넘치는 시절을 지내셨던 것같습니다.

그 후 우리 세 명의 여동생들의 대학진학의 길은 순조로웠지요.  


큰언니가 대학에 다니실 때는 기숙사에서 지내셨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큰오빠가 서울로 올라오시게 되자 

어머니는 서울에 작은 집을 마련하여 일하는 아줌마까지 두고 저희들을 서울에서 공부시키셨지요.  

지금도 시골에 사시는 분들은 여전히 그렇게 하실 것이고 이제는 외국으로까지 보내고 있으니 

한국 부모님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그 어느 나라도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큰언니는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의 영향으로 당시부터 오페라, 교향곡 등 클래식 음악에 

일찍부터 심취하게 되어서 음악전집을 밑줄을 치면서 밤을 세워 읽으시며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지휘자들, 그 많은 오페라 아리아들, 교향곡들과

세계적인 연주자들의 이름을 줄줄 외우셨고 음악회에 다니시는 것을 몹시 즐겨하셨습니다.

74년부터 미국에 거주하던 저에게 1984년 3월에 창간된 음악, 공연 예술 전문 월간 잡지 "객석"과

지금은 작고하신 음악평론가 김원구님의 <형이상학적인 음악의 강은 흐른다> (1985)라는 책과 

한국일본 논설위원을 지내신 김성우님읜 <명곡의 고향을 찾아, 세계의 음악기행> (1997)이라는 책을 

보내주시기도 하여 저에게 클래식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하셨지요.






큰언니가 여성으로 당시에 법과대학에 진학한 것은 순전히 웅변을 잘하셨던 까닭이라고 하는데

졸업을 하고 언니는 고시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엄격한 가정의 형부와 중매로 만나

결혼을 하게 되어 언니의 꿈과 소망과 낭만은 가정이라는 굴레에 깊이 묻혀 버리고 말았지요.


음악이나 미술, 예술에 대한 열정 뿐만 아니라 독서를 무척 많이 하신 문학소녀였던 언니는

가정이라는 굴레에서 잠시 날개 잃은 천사로, 대화의 상대가 없음으로 인하여 허허로운 가슴을 안고서도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시면서 남편의 '돕는 베필' 역활도 잘 감당하셨지요.


그러나 문학에의 꿈을 저버릴 수 없었던지 아들들이 대학에 진학한 후

수필문학을 공부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50대에 주부작가로 등단하시며

동호인들과 함께 책을 출간하시기도 하고 언니 자신의 수필집을 출간하시기도 했습니다.

유럽이나 외국여행도 많이 하셨는데 외국어에 대한 열정도 대단해서 일본어는 물론 영어, 불어까지 

학원에 다시면서 배우시는 등.. 그래서 일본에서는 일본말로, 심지어 프랑스에서는 불어를 구사해서

가이드를 놀라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미국에 오셨을 때도 영어로 소통하는데 불편하지 않았지요.


7형제의 맏딸로 동생들에 대한 사랑도 그 누구도 따를 수가 없었고

부모님께서 다 돌아가신 후에는 지금까지 동생들에게 어머니 역활을 하실 정도로

6명의 동생들을 일일이 챙기시기도 했습니다.


다섯째인 저와는 12살 차이이기에 언니가 한참 유럽여행 등 해외여행을 다니실 때 저는

애들을 키우느라 정신없이 지냈는데 그 후 제가 유럽여행을 하면서 블로그를 시작할 때 쯤에는

언니는 더 이상 여행을 하실 연세가 아니셨기에 오히려 제 포스팅을 즐겨 보시면서 

'너는 어쩌면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시들을 포스팅에 올리니?' 라고 하시며 

제가 여행 다니는 것을 누구보다도 기뻐하셨습니다.


블로그에 어느 날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암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대해 올린 포스팅을 보시고 

아래와 같이 이메일을 보내시기도 하고


"우리에게서 시간은 황금이라고 생각한다 .

돈이 황금이 아니고 시간이 황금이다 .

우리가 남은 시간을 허비 한다면 시계가 배앝는 외마디 소리는

"상실, 상실, 상실"이다.

그래서 시간을 황금처럼 다루어야 하리라.

 

29일 설악산 오색에 온천호텔에서 2박 3일 쉬고온다.

6월 9일은 규슈일주가 예약 되었다.

네가 프라하에서 오고 난 후에 떠나는 구나.

최근에도 TV에서 흑백영화가 상영 되었었다.

너는 어찌 내가 좋아하는 작품만 올리는지?

나는 블랑쉬에 더 많이 공감하고있다."

 

큰언니



유럽여행기 포스팅을 보시고는,


"너의 블로그는 정말 감동이다.  

2,3일 마다 체크를 하는데 친구들도 모두 보는 순간 행복하다고 한다.

스페인 중앙시장, 벨기에의 중앙역 동영상, 장발잔이며 노래 때문에 까무러치겠다.

나는 스페인도 빠리도 두번씩 갔으니까 얼마나 젊은 날의 추억을 되돌려 주는지...

다음은 프라하를 꼭 가거라. 

동구라파의 드레스덴에서 미술과 조각을 많이 보고 프라하에 가면 또 한번 까무러칠 것이다.

블타바 강은 몰다우 강인데 까를 4세의 다리 위에서 die moldau를 들을 때는...

아, 상상 만으로도 기절하겠다.


우리들은 스스로 자기를 위로할 필요가 있다.

살아가면서 다친 상처를 스스로 치료해야 한다.

예술은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정화시키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네가 여행하는데 왜 내가 이렇게 기쁠까...


요즈음 사실은 언니는 장염이 한달간이나 안 나아서 치료중이다.

참석해야 할 결혼식이 4개나 있었는데 참석하지 못하고

결혼 50주년 기념으로 가려고 했던 그리스-항거리-에게해 크루즈도 취소하고

아오모리 온천 4일간을 예약했는데... 이것 조차 취소해야 할 것같다.

감기 들거나 장염이 재발하거나... 이런 일은 없었는데

아직도 병원 치료 중이다.

지금 흰죽 점심 먹어야 하니 끝내마.

큰언니...



이 이멜을 보내신 후 얼마 지나서 언니는 70이 넘은 연세에 대장암 판정을 받고

대장암 수술을 하셨고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좋아하시던 여행은 더 이상 못하셨지만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회관에서 하는 컨서트는 가끔 다니셨는데 3년 전 형부를 먼저 보내고 나서

형부를 꿈에 자꾸만 본다고, 보고 싶다고 하시더니 이렇게 황망히 형부 곁으로 가셨나 봅니다.






그래도 지난 해 (2017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예술의 전당과 롯데홀에 와서

공연을 할 때 누구보다도 저의 막내딸이 단원이 된 것을 기뻐하시며

두 군데 공연을 몸이 불편하셨지만 다 관람하기도 하셨습니다.



별. 7

     눈물마다 하늘에 올라가

     이별마다 하늘에 올라가

     은하의 강이 되고

     빛나는 별이 되어

     영혼까지 비추는 별이 된 것을.

  

     아름다운 죽음마다

     별이 되어서

     이생의 죄를 지고 가나니

     서러워 말라

     너도 곧 별이 될 것을

 

     별이 되어

     하늘에서 만날 것을

     은하수 타고 가며

     그 때의 이별을

     노래할 것을.

     -김소엽-



내일 있을 발인식에도 참석하지 못하지만

머지 않아 우리도 가야 할 길을 조금 앞 서 가신 것이라 여기며

하늘나라에서 먼저 가신 형부와 사랑하던 친구들도 반갑게 만나서

즐거운 나날을 지내시기를 기도하면서 

아름다운 죽음... 별이 되어 하늘에서 만날 것이기에

애석하지만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