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의 내용은 다 잊어버렸지만 프라하의 어느 광장의 우중충한 벽,
연인들이 이 벽에 메모를 남기기도 하고, 만남의 장소로 나왔던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 나온 메모벽이 궁금해서
프라하에 가서 맨 먼저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 우중충한 벽은 프라하의 구(舊) 시가지 중심 광장에 있는
종교 개혁자 얀 후스(Jan Hus: 1372-1415)의 동상 밑부분이었고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애용되는 것같았지만 그곳의 어느 벽에도 메모는 없었습니다.
아마 드라마를 쓴 작가가 인위적으로 그런 설정을 한 것같습니다.
이 동상은 1415년에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이단자"로 정죄되어
독일의 콘스탄츠 교외에서 화형을 당한 체코의 종교 개혁자 얀 후스의
서거 500주년을 맞아 1915년에 세워진 얀 후스의 동상인데
체코의 독립과 민족정신의 상징으로 프라하 구시가지의 가장 중심에 있어서
프라하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곳으로
1968년 소련이 프라하를 침공했을 당시에는
검은 띠로 얀 후스 동상의 눈을 가리었다고 합니다.
얀 후스 (image from web)
체코 공화국의 보헤미아에서 1372년(?) 경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얀 후스(Jan Hus, 1372? - 1415)는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지역의 최고의 명문 대학인 프라하 대학에서 신학과 문학을 공부했고
1398년에는 이 대학의 교수로 신학을 강의 하였으며 1401년에는 철학부장,
1402-1403년에는 학장, 1409년에는 총장직을 지냈다고 합니다.
프라하 대학은 당시 유럽 굴지의 대학이었고 프라하를 중부 유럽의
학문과 문화의 중심 도시로 만들었던 대학이었습니다.
대학에서의 경력 뿐만 아니라 1400년에는 카톨릭 사제가 되어
프라하대학 학장시절에는 3천명 가량이 모이던 프라하 베들레헴 성당의 주임신부를
겸하고 있어서 일반 시민들에게도 명 설교가로 많이 알려졌던 인물이었습니다.
후스는 당시 옥스포드 대학에서 명성을 떨치던 교수, 존 위클리프(1330-1384)의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아 그의 글을 체코어로 번역하기도 하면서
"진리의 근원과 진리의 표준은 오직 성경 말씀"이라는 신앙적, 신학적 입장을
주장하면서 당시 교회의 도덕적 타락, 성직 매매, 면죄부 판매 등을 책망했고
교황이 갖고 있던 교황권은 성경 어디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그는 당대 명문대학 총장이었고 최고 지성인이요 유럽의 유명 인사였지만
카톨릭 교회에서 볼 때 그는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단자"였기 때문에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는 나빠져 가고 있었습니다.
1410년 피사 종교 회의에서 선출된 교황 알렉산더 5세는 후스에게 그동안의
주장들을 철회하도록 명령했고 후임 교황인 요하네스 23세도 1411년에 후스를 파문하여
프라하에서의 모든 교회 활동을 금지 당하여 후스는 남 뵈멘지역의 들판과 광장에서
민중을 향해 진리를 설교하며 라틴어로 "교회론(De Ecclesia)"이라는 글을 써서
로마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는 등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있었으므로
로마 교황청에서는 그를 처단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1414년에 카톨릭 교회의 종교 회의가 독일 남단에 위치한
콘스탄츠에서 개최되었는데 로마 교황청은 그를 그곳에 소환하였고
후스는 이 종교 회의에 참석하여 자기의 입장을 알리고 교회 개혁을 설득하기고 마음 먹고
신변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하여 당시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이며
보헤미아왕을 겸하고 있던 독일 지그문트 황제의 편지를 가지고 콘스탄츠로 갔지만
콘스탄츠에 도착한 즉시 후스는 체포되어 투옥 되었습니다.
후스는 투옥된 상태에서 그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고 강요 당했지만
콘스탄츠 종교회의가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그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지적해 주지 않는 한 생각을 바꿀 수 없다고 맞섰고
독일 황제가 중재에 나섰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이
1415년 7월 6일에 "이단자"로 정죄되어 화형 당하였습니다.
화형당하는 얀 후스(from Web)
후스와 같은 신학적 입장에서 후스의 입장을 대변했던 히로니무스 폰 프라하도
같은 이유로 같은 방법에 의해 같은 장소에서 화형대의 연기로 사라졌습니다.
지금도 독일 콘스탄츠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큰 바위가
그 날의 비정한 사건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고 합니다.
독일의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기 100여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가 화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이 보헤미아 지역에 전해지자
국민들의 충격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프라하 대학은 총장의 죽음을
"순교자의 죽음"으로 선포했고 그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후스는 체코인들이 가장 추앙하는 역사적인 인물이며
"주님의 진리가 승리하리라!"라는 그의 삶의 모토는
현재 체코 공화국의 모토로 채택되었다고 합니다.
"크리스천들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에 귀를 기울여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고, 죽음을 두려워말고, 진리를 사수하라.
그것은 진리가 죄와 악마와 영혼의 죽음과 마침내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너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얀 후스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얀 후스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진리의 추구"였습니다.
저는 평신도이지만 오늘날의 교계를 볼 때 개신교 자체 내에서
이러한 얀 후스의 "진리의 추구"가 절실히 필요한 때가 아닌지
얀 후스에 대한 것을 검색하여 정리하면서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체코의 국민음악가 베드리흐 스메타나의
현악 4중주 "From My Life"의
1악장: Allegro vivo apposionato
The Jasper String Quartet이 연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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