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한 이야기

27시간 만에 집으로...

후조 2015. 7. 30. 09:23

 

 

 

여행 중에는 언제나 기대하지 않았던 일을 만날 수 있고

그러한 경험이 또 저의 소중한 추억이 되기도 합니다.

비행기 여행인 경우 비행기가 연발착을 하는 것은 다반사인데

대개는 출발이 늦어지더라도 도착시간에 맞추게 되는 것은 많이 경험한 일입니다.

 

그런데 몇년 전 동부의 딸네집에서 2주동안 AS(?)를 해주고 드디어 집에 돌아가는 날,

순전히 AS차원이라 곁지기가 같이 가지 않고 혼자만 갔었는데 돌아오는 날은

오후 3시 비행기라고 1시경에 택시를 불러 필라델피아 공항에 나갔습니다.

딸과 사위가 공항에 데려다 준다는 것을 궃이 뿌리치고 택시를 부른 것은

"만남은 길어도 이별은 짧게"라는 저의 철칙때문이었습니다.

막내를 그곳에 두고 오려면 언제나 가슴이 미어져서 내린 결론입니다.

 

그 옛날 감성이 풍부하시고 사랑이 많으셨던 저의 친정어머니께서는

친구나 친척이 시골집에 찾아 왔다가 갈 때는

버스정류장에서는 버스가 떠나서 먼지를 일으키며 그 먼지 속으로 아스라히 사라질 때까지,

기차역에서는 그 기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긴 꼬리가 아득이 사라져 기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시절에는 그것이 미덕이었고 내 어머니의 마음 씀씀이셨습니다.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저는 딸들에게 눈물을 보이는 것을 자존심 상하게 생각하니까

왠만해서는 눈물이 날 상황을 만들지 않습니다

 

공항에 도착하니 필라델피아에서 출발하는 비행기가 1시간 40분 연발이라

오후 4시 40분 출발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아틀란타에서 갈아타는 일정이지만 3시간 시차가 있으니까

저녁 9시 40분 엘에이에 도착하는 것은 지장이 없을테니까

가지고 간 책을 읽으면서 여유롭고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5시가 지나고 6시가 지나도 제가 타야 할 비행기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비도 별로 많이 오지 않는데 기후때문에 들어와야 할 비행기가

볼티모어에서 붙잡혀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점점 걱정이 되어가는데 어찌하랴, 속수무책이지...

가방 하나를 첵크인만 하지 않았으면 그냥 포기하고 돌아갈 수도 있었는데

그럴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은 입장으로

모두들 조용히 기다리는데 나라고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7시 경에 비행기가 들어오니까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두들 박수를 치더군요.

 

승객들이 내리고 우리가 탑승하니까 7시 반이 넘었습니다.

아틀란타까지는 2시간 거리, 9시 반에 도착하면 10시 15분 비행기가 있으니까

갈아 탈 수 있을 것으로 알고 10시 15분 비행기 보딩 패스도 받은 상태라

간신히 엘에이에 도착할 수 있겠지...라는 희망을 가지고 탑승을 하였습니다.

예전에는 non-stop을 주로 탔었는데 이제는 기내에서 음식을 주지 않으니까

갈아 타는 비행기를 택하면 중간에 내려서 음식도 사먹고 다시 타면 지루하지도 않아서

언제부턴가는 갈아타는 쪽을 선호하였습니다.  값도 저렴하고...

 

비행기가 슬슬 활주로 쪽으로 가더니...

그러나 왠일, 승객을 다 태운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마냥 또 기다립니다.

기후때문에 관제탑에서 이륙허가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전 에어 프랑스가 번개로 사고가 난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며

늦어지는 것보다는 안전이 우선이라고 여겨 탑승객들도 모두 다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1시간 이상 지나니까 어느 뚱뚱한 미국인 부부가 지병(당뇨병)때문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돌아가야 한다고 해서

활주로에 기다리고 있던 비행기가 다시 게이트로 돌아갔습니다.

 

그제서야 승무원들이 나와서 포기할 사람들은 지금 포기하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들도 언제 떠날지는 확실히 모른다면서...

아틀란타가 목적지인 사람들이야 그래도 괜찮지만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하여

갈아 타야 하는 사람들은 난감한 일이지만 다들 조용하더군요.

저도 될대로 되라지, 하는 심정으로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탑승한지 2시간이 지나도 떠날 생각을 안하고 있었지만

승객들은 누구 한 사람 물어보거나 불평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불평한다고 비행기가 떠나며 불평하지 않는다고 안 떠나겠는가....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이렇게들 조용하게만 있었을까...

아마도 도대체 언제 떠나느냐고 큰 소리.를 쳤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소용없는 일에 쉽게 혈기를 부리는 등, 에너지를 낭비한다고 여겨졌습니다.

 

드디어 비행기가 탑승한지 2시간 반이 지난 10시 경에 출발하여

자정에 아틀란타 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라 당연히 달아 탈 비행기는 없으니까

다음 날 오후 12시 40분 출발하는 비행기의 보딩패스를 주면서

호텔 디스카운트 쿠폰이라면서 핑크색 종이를 한 장씩 주더군요.

기후때문에 늦어진 것이니까 자기네들은 책임이 없으니까 호텔은 각자 부담하라고...

무슨 말을 더 하랴....ㅋㅋ

 

 

 

 

 

엘에이 공항에 마중 나오기로한 엘에이에 있는 딸에게 전화를 했더니

컴퓨터로 아틀란타 공항 주변의 호텔을 첵크하면서 싼 호텔에 가면 안되고

힐튼호텔 정도가 좋겠다고 합니다.  그 정도는 나도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일...

밤 자정이 넘어 여자 혼자서 호텔에 들어가는 상항이니

그것도 흑인들이 많은 남부 조지아주 아틀란타에서...

물론 저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틀란타 공항을 가 보신 분은 알겠지만 엄청나게 큰 공항이고 아주 특이하게 생겼습니다.

게이트에서 나와 Baggage Claim 하는데로 가서 밖으로 나가려면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중간 통로가 있고 그 양쪽에는 벨트(빨리 이동할 수 있는)가 있고

그 양쪽에는 터미날 A 부터 E 까지 데려다 주는 concourse라고 하는 빠른 기차가 있습니다.

 

물론 밤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사람들도 많지 않은데 그 긴 통로를 내내 걸어서

밖으로 나오니 대뜸 키가 큰 검은 피부의 택시운전수 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서

호텔로 가는 셔틀은 밤 11시에 다 끊어졌다고 묻지도 않는 말을 하면서 택시를 타라고 합니다.

아틀란타는 남부지역이라 검은 사람들이 많은 곳입니다.

대답을 하기도 무서워서 얼른 다시 공항 안으로 들어가서 호텔광고판을 살펴보니

대부분의 호텔이 24시간 셔틀 서비스를 한다고 써있었습니다.

 

힐튼에 전화해서 셔틀이 다니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셔틀버스가 스탑하는 곳까지 한참을 걸어가니 반갑게도 힐튼호텔 셔틀이

저를 기다리고 있듯이 서 있었습니다.

얼른 올라타니 승객은 오직 저 한 사람, 나이 많은 백인 할아버지가 운전수,

처음에는 무뚝뚝하더니 내가 팁을 찾느라 백을 뒤지고 있으니까 눈치를 채고

불과 5분 만에 호텔에 도착하여 잘 쉬라고 친절하게 인사를 합니다.

팁 몇 불이면 그들의 친절한 대우를 받으니까 저는 어디에서나 팁은 아끼지 않습니다.

 

쿠폰 덕분이었는지 너무 근사한 방이 65분, 첵크인 하고 방에 들어가니

밤 1시가 훨씬 넘어 버렸습니다.  오후 3시 비행기라 오후 1시에 집에서 나왔는데

2시간 거리의 아틀란타까지 12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침대에 벌렁 누우니 그제서야 피곤이 쏟아졌습니다,

 

그래도 뭐를 좀 먹고 자야 될 것같아서 룸서비스로 간단한 음식을 시켰는데

30분이 지나도 오지를 않더군요.  잠이 들어버릴 것같았는데...

2시 경에야 음식을 들고 온 사람은 이번에도 또 나이 많은 백인 할아버지...

왜 이렇게 나이 많은 분들이 밤 늦은 시간에 일을 하는지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혼자서 남부 아틀란타 공항 근처의 호텔에 머물게 되다니...

여류화가로 유명한 천경자화백은 60년대 말부터 70년대 내내,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그것도 혼자서 아프리카같은 오지까지 찾아다니면서 스케치를 하였었지요.

그 때만해도 해외여행이 그렇게 자유롭지 못한 때였는데 그 분의 책을 읽으면서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 천경자화백에 대하여 정중헌씨가 쓴 <천경자씨의 환상기행>을 읽으면서

저는 그림이라고는 꽃 하나 제대로 그릴 줄을 모르니 스케치 여행은 택도 없고

음악기행을 하면 어떨까? 라고 막연한 생각을 해보았었는데...

오지까지는 그만 두고 유럽이라도, 잠시 그러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야식을 먹고 씻고 누우니 그냥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다음 날 오후 12시 40분 비행기라 느긋하게 준비하고 나와서 공항에 도착하니

어제 밤과는 아주 다르게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비행기 회사들이 가방마다 15불씩 추가 요금을 내게 하면서 부터는

왠만하면 들고 들어갈 수 있는 가방을 가지고 비행기를 타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들고 가는 짐이 오히려 많아졌습니다. 

저마다 케리하는 가방 하나, 어깨에 멘 가방 하나씩을 가지고 게이트를 향하여

그 긴 통로를 열심히 걷는 것을 보니...마치 피난민들이 이동하는 것같았습니다.ㅎㅎ

 

표지판을 보니 통로의 전체 길이가 1800 미터쯤 되었습니다.

concourse로 가려고 올라 탔는데 고장인지 한참을 기다려도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다시 걷기 시작, 다행히 게이트가 C라서 그 긴 통로의 중간쯤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주 예정대로 점잖게 탑승, 비행기는 예정시간에 엘에이 공항게 도착했습니다.

필라델피아 공항에 택시로 도착한지 27시간 만에...

 

그런데 Baggage Claim에 가서 가방을 기다리는데 이번에는 가방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른 가방이 다 나와도 제 가방은 보이지 않아 다시 난감...

직원에게 물으니 제 가방은 더 이른 비행기로 나보다 먼저 와 있다고 합니다.

 

휴.... 한숨을 내쉬고 가방을 찾아 밖으로 나오니

선선한 날씨, 밝은 태양, 팜트리와 보라색 자타란다 꽃...

여행에서 돌아오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제 엘에이는 저의 고향으로 느껴집니다.

 

어느 해 자카란다가 피는 계절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2011/05/15)





음악은 제가 좋아하는 드볼작의 "From the New World" Symphony.

2nd movement, Largo의 첫 부분입니다.

드볼작이 미국에 와서 살 때 고향을 그리면서 작곡한

너무나 유명한 교향곡이지요.

 

 

 


사슴의 정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항공사 못되었네요.

예전에 루프트한자를 이용하면서 프랑크푸르트에서 폭설로 지연되자

호텔숙식과 저녁 쿠폰을 주던데

아틀란타에 들리셨으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현장을 겸사겸사하여 구경하셔도 좋았을  2011/05/15 07:35:25  


김민경

혼자 여행에 저라면 참으로 난감했을거라 생각되는데 참으로 용하심니다.
아틀란타! 아직 못가봤지만
레트 버틀러가 떠오르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 1순위랍니다.
고생은 많았지만 건강히 다녀오심을 축하합니다. ^_^ 2011/05/15 07:55:43  


trio

워낙 싸구려 표였거든요. 그러니 호텔비를 지불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래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으니..
아틀란타에는 조카가 공부하고 있는데 아직 그곳 구경을 못했습니다.
언제 조카한테 갈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슴의 정원님! 2011/05/15 09:28:01  


trio

저도 난감했지만 닥치니까 할 수 없이...ㅎㅎㅎ
민경씨 주말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감사합니다. 2011/05/15 09:29:16  


멜라니

Trio님, 혼자서 정말 난감하셨겠어요.
야밤에 거짓말하면서 택시 타라고 하는 운전 기사.. 무섭네요..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무지 재미나게 읽었습니다ㅎ.. 용서하세요.
 2011/05/15 13:28:35  


silver rain

Trio님.다녀가 주시어 감사드리고요.
조금 떨립니다.ㅎㅎ
메인에 갈 때 덴버 공항에서 델타의 연착으로 귀한 여행일정 하루가
그냥 날라가버린 경험이 있지요.
반갑습니다.^^*

 2011/05/15 14:27:58  


trio

멜라니님이 재미나게 읽으셨다니 저도 무지 재미나네요.
생각해보니 정말 잊지못할 추억이 되었습니다.

은비님, 메인의 랍스터...저희도 몇해전에 메인 주에 갔을 때 어느 피어에서
옥수수와 함께 삶아 준 것을 그 자리에서 맛있게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버터 대신에 가지고 간 고추장과 함께 ㅎㅎ
 2011/05/16 08:13:59  


옛멋

저 자카란다를 보면 우리나라 오동나무꽃과 참 많이 흡사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맑고 고운 보라빛을 참 좋아 하거든요. 예전 그리스에서는 저 보라빛을 왕들만 공유하려고 보라색은 정신나간^^ 사람만 좋아한다는 설을 만들기도 했지요. 보라색을 만들기가 어려워서.. 2011/05/31 10:18:55  


trio

저도 보라색을 너무나 좋아하여 이 때가 되면 동네마나 흐드러지게 피는
자카란다를 참 좋아한답니다.
정신나간 사람(?)만 좋아한다는 설이 있었군요.
보라빛은 어쩐지 창백한 영혼의 소유자가 좋아하는 색갈인 것같아서
그런 말도 나왔는가 싶네요. 다녀 가심...감사합니다.
 2011/05/31 10:3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