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한 이야기

어느 시인의 시 '자화상"과 프리다 칼로

후조 2012. 3. 14. 00:09

 

나이가 들어가면서 의사에게 가거나 병원에 가는 일이 점점 늘어만 갑니다.

또한 이웃이나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도 어떤 음식이 건강에 좋은지, 어떤 운동이 좋은지,

누구는 어떤 병에 걸렸느니, 누가 무슨 암으로 투병하거나, 죽었다는 대화가 많아집니다.

또한 꿈을 먹고 산다는 젊은이들과는 달리 나이가 들면 과거를 먹고 산다는 말처럼

거의 모든 대화들이 과거에 대한 것이 많아서 그런 대화를 하고 나면

어느 새 나 자신이 이렇게 늙어버렸는 가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런 대화들을 빼 놓고는 나눌 대화도 마땅이 없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일상이 지겨워질 때쯤 가장 좋은 탈출은 역시 훌쩍 어디론가 떠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그런 방랑의 벽이 내게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2주를, 그 중에 한 주간은 플로리다에서 자동차로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고,

또 다른 한 주간은 전화도 컴도 없이,

물론 로밍을 하거나 비용을 내면 사용할 수 있었지만, 배에서 지내고 돌아오니

친구가 이번에는 어디로 튀었었느냐고 채근하네요. ㅎㅎ

 

  

 

끝도 없이 펼쳐진 Palm Trees를 달리는 자동차에서 찍어서 조금 흔들렸네요.

 

 

 

 

플로리다 올랜드에서 조금 남쪽 키시미(Kisimmee)라는 곳에 있는

어느 휴양지에 사시는 화가이며 성악가이신 재미교포 시인 이행자님을 만나

막 출간된 시집을 한권 선물로 받았습니다.

<사랑이 능금으로 익는 줄을>

 

그 안에 "자화상"이라는 시가 따로 들어있었는데

출판을 할 때 누락된 詩라고 하였습니다.

휴양지의 별장같은 집을 모델하우스처럼 멋스럽게 단장을 해 놓고

뉴저지의 겨울에는 따뜻한 이곳에 와서 서너달 씩

그림도 그리고, 도 쓰고, 골프도 즐기면서 보내신다고 합니다.

 

너무나 곱고 아름답게 노년을 보내고 있는 시인은

벌써 7순을 넘긴 연세인지라 삶을, 그리고 인생을 아주 깊고 진지하게 통찰하며

존재에 대해 고뇌하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곱고 아름답게 여겨졌습니다.

플로리다 여행에서 예정에 없던 짦은, 그러나 긴 여운을 주는 만남이었습니다.

 

 

<자화상>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캔바스 앞에 앉았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수 없이 바라보며

드로잉을 해 보지만 그림이 완성 단계에

이르러도 내 얼굴이 나타날 기미가 없다

보면 볼 수록 타인이 되는 얼굴

지웠다 그렸다 하기를 수 없이 반복하지만

그림 속엔 내가 없다

 

십년 전의 내가 아니듯 작년의 내가 아니듯

어제의 내가 아닌 나

자화상을 그려본 사람을 알 것이다

살아 오는 동안 수 만번 보았을 거울 속 모습

그것이 착각이였음을

그것이 환상이었음을

 

칙칙하게 빛바랜 여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물같이 흐르며

나면서 내가 아닌 그녀

어느 순간도 잡을 수 없는 바람 같은 여자

내게 자화상은 없다.

 

- 이행자 -

 

 

 

"자화상"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떠오른 화가가 있었습니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 멕시코의 여류화가,

초현실주의, 상징주의 화가, 매우 불운한 생을 산 화가인데

자화상을 가장 많이 그린 화가로도 유명합니다.

 

그녀는 어릴 적 뇌성마비를 앓았고

18세 때 교통사고로 척추, 오른쪽 다리, 골반 등을 크게 다쳐서

수십번(?)의 수술을 받았다고 하니 당시 의료기술이 지금처럼 발달된 때도 아닌데
어떻게 그 많은 수술을 하였는지... 그 때마다 겪었을 고통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칼로와 남편 디에고 리베라, 1932 (image from internet)

 

 

 

또한 당대 멕시코의 유명한 벽화화가인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을 하지만

결혼생활이 결코 행복하였을리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

  

다복하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시는, 끝내 자신의 모습을 그릴 수 없었다는 위 시인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삶을 산 프리다 칼로는 처절한 육신의 고통과 싸우면서 오직 그림에 메달려

불꽃같은 47년의 생을 살면서 남긴 143점의 그림 중에서 55점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녀의 일생을 그린 영화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녀의 고통스러웠던 삶을 말해주듯이 미소 없는 차가운 얼굴,

멕시코 여인 특유의 검은 머리와 검고 두터운 두 눈섭은 거의 붙어있어서

매우 강렬한 인상이지만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자화상에 꽃들과 새, 고양이, 원숭이, 등 동물과 함께 있는

그림을 그렸고 심지어는 뱀으로 목걸이를 한 자화상도 있습니다.

 

언제나 병상에서 고통스럽게 누워있었던 그녀에게 자기 자신이 가장 좋은 모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화상을 많이 그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항상 꽃들과 동물들과 함께 거하는 것을 꿈 꾸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꽃이나 동물들과 함께 있는 모습에서도 미소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육신의 고통은 모든 즐거움을 앗아가버려

입 가에 한 줌의 미소조차 남아있지 못한 것같습니다.

 

 


 



"작은사슴 The Little Deer" 1946 

Oil on Masonite 8 7/8 x 11 7/8 in
Collection of Mrs. Carolyn Farb, Houston

 

 

 

"부서진 척추", 1944년, 캔버스에 유채, 40x30.5cm

 


"부서진 척추"라는 자화상을 그리는 모습

 

 

더욱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자화상으로 수 많은 화살에 찔려 피 흘리는 "작은 사슴"과

온 몸을 쇠로 결박한 모습의 "부서진 척추",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프리다 칼로...

이토록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예술로 승화된 그의 강인한 투쟁와 승리는

연약하고 나약한 현대인들에게 울리는 경종이 된다고 여겨집니다.

 

자화상...

나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일까....

 






 

 

흐르는 음악은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의

Piano Trio in A minor, Op. 50, 1악장:  Pezzo Eligiaco입니다.

Piano: Anastasia Injushina, Violin: Ana Chumachenco,

Cello: Alexander Baillie  

 

이 음악은 "어느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이라는 부제가 붙은 곡으로

모스크바 음악원의 초대 원장이며 피아니스트였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죽음 후에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작곡한 곡입니다.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은 차이코프스키의 스승이었는데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B단조, Op. 23에 대하여

혹평을 하여서 둘은 별로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가

이 후 이 협주곡이 명피아니스트들의 연주로 호평을 받게 되자

루빈스타인은 차이코프스키에게 사과를 하여 둘은 화해를 하고

차이코프스키는 루빈스타인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루빈스타인이 파리에서 1881년 3월 23일에 숨을 거두자

차이코프스키는 차기 모스크바음악원의 원장의 물망에 올랐지만 사양하고

이태리의 로마에 가서 그를 애도하기위해 이 곡을 작곡하였다고 합니다.

 

오늘날 이 곡은 그의 실내악곡 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곡입니다.


2012.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