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세느강 안의 시테섬에는 노틀담 성당, 생트 샤펠성당,
재판소, 등이 있고 생트 샤펠 성당 옆에는
화려한 뽀쪽탑의 이름도 낯설은 '콩시에르주리'라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콩시에르주리 Conciergerie
원래 이 건물은 14세기 필립 4세 때 궁정 관리 대신들과 경비병들을 위해 지어진
왕궁의 일부였는데 1391년부터 1914년까지 감옥과 고문실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프랑스혁명 당시에는 2천명 이상의 귀족과 혁명가들이 이곳에서
혁명 재판의 재판을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고 단두대에서 처형되기 전에
머물렀던 방들이 있는 피비린네 나는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이곳에 프랑스 혁명 당시의 왕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죽음을 기다렸던 방이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분노한 민중들의 봉기로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왕정이 무너지고 신분이 폐지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 후로도 많은 역사적인 사건을 뒤로 하고
오늘날 프랑스는 세계적인 예술과 문화와 퍠션을 주도하는 나라가 되어
프랑스의 파리는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고 꿈꾸는 도시가 되었지요.
그러나 이렇게 어둡고 무서운, 마치 희생자들의 유령이 떠돌고 있는 듯한
음침한 뒷면이 지나 온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역시 전쟁과 피의 역사임을 실감하는 장소였습니다.
콩시에르주리 내부에 들어서니
무슨 감옥이 이렇게 근사한지 스페인에서 본 회교 사원같기도도 합니다.
더 들어가니 음침한 내부가 마치
이곳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유령이 나올 듯 하였습니다.
감옥으로 쓰여진 방과 간수의 모형
콩시에르주리를 설명하다보니 오스트리아의 공주로 14세의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프랑스의 황태자, 루이 오귀스뜨 (나중에 루이 16세가 된)와 결혼을 하고
34세의 젊은 나이에 이곳에 머물고 있다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뚜아네뜨 (Marie Antoinette d'Autriche:1755-1793)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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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뚜아네뜨는 1755년 11월 2일,
비엔나에서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이자 토스카나 대공인 프란츠 1세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이자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이에서
15번째 자녀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나 댄스, 하프 연주 등을
배우며 자유 분방하게 성장하였다고 합니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여제(女帝)는 프랑스와의 동맹 관계를 강화하려고
자신의 딸을 당시 프랑스의 황태자였던 루이 오귀스뜨(나중의 루이 16세)와
정략 결혼을 획책하였습니다.
1769년 6월, 루이 15세가 보낸 약혼 문서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보내졌고
1770년 5월 16일 마리는 14살의 나이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와의 결혼식을 치루고 프랑스의 황태자비 마리 앙뚜아네뜨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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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남편 루이의 성(性)불구 등의 문제로 결혼한 후 7년 동안이나 자녀가 없었고
(나중에 치료를 받아 아이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취미나 성격 등이 달라서
두 사람의 관계는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같습니다.
또한 오스트리아인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적대감으로 궁중안팍에서 모두가
그녀를 싫어해서 그녀를 "오스트리아 여자"라는 뜻의 "오트리시엔"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루이 14세가 20년에 걸쳐서 지어서 왕궁을 이곳으로 옮겼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뚜아네뜨가 살다가
프랑스 혁명으로 비운을 맞이한 베르사이유 궁전...
시내에서 RER이라는 고속 전철을 타고 베르사이유에 도착하니
날씨는 몹시 추웠고 간밤에 내린 눈이 아름다운 설경을 보여주었습니다.
궁전 안에서 가장 화려한 샹데리아와 거울로 된 거울의 방
그녀가 죽기 전에 갇혀있던 감옥의 방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중의 하나인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
그러나 겨울이라 눈밭이 되었습니다.
봄이나 여름에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베르사이유 궁전 정원의 여름 모습
많은 시녀들을 거느리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남편인 황태자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던 그녀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의상이나 장신구, 보석 등 사치에 몰두했으며
밤마다 베르사유 정원 한 구석에 있는 별궁인 쁘띠 뜨리아농에서 호화로운 파티나
가면무도회를 자주 여는 등 호사스럽고 향락적인 무절제한 생활로 왕정의 재정을 낭비하였습니다.
원성이 높아진 민중들은 그녀를 "적자부인"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종종 서신을 보내 그녀의 잘못된 생활에 대해
크게 질책하기도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또한 14세의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여 철이 없었는지,
흉년으로 고생하는 민중들이 먹을 빵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빵이 없으면 과자(부리오슈, 일종의 케익)를 먹으면 될것 아냐.."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고 합니다.
6.25전쟁 때 먹을 양식이 없었다는 말을 들은 우리들의 자녀들이
"밥이 없으면 라면을 먹지"라고 말했다는 것과 같이...
1774년 루이 15세가 병으로 서거하여 남편인 루이 오귀스뜨가
루이 16세로 즉위하자 그녀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어 남편으로부터
베르사유의 쁘띠 뜨리아농 궁전을 선물받았습니다.
그녀는 인공 연못 공사 및 바닥 공사를 비롯하여 뜨리아농 궁전을
전원적인 분위기로 개조하는데 막대한 돈을 투자하였고 거기에다 1785년에는
부르봉 왕가의 치세 말기를 상징하는 스캔들인 마리 앙뚜아네뜨의 목걸이 사건이 발생하여
그녀에 대한 민중의 불신이 한층 높아졌습니다.
사건의 개요를 보면, 어느 날 로마 카톨릭 주교인 로앙 대주교에게 라 모뜨 부인이
‘왕비가 540개 다이아몬드가 박힌 160만 리브르짜리의 값비싼 목걸이를 욕심내고 있다’는 말을 흘렸고
이에 귀가 솔깃한 로앙 대주교는 대뜸 구매 계약서에 사인하고 대금 일부를 지불해 주었으나
목걸이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고 도중에 없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지불일이 되어 돈을 받지 못한 보석상이 앙뚜아네뜨를 찾아가 호소하니까
앙뚜아네뜨는 대주교에게 화풀이를 하였는데 재판 결과 대주교는 무죄 선고를 받고
사기꾼 라 모뜨 부인은 국외 추방령을 받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 되었지만
왕비의 체면과 위신은 여지없이 땅에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와중에, 마리 앙뚜아네뜨와 스웨덴 귀족 한스 액셀 폰 페르센 백작과의 염문이 퍼졌고
한편, 그녀는 폴리냑 백작부인 등 자신의 마음에 드는 소수의 귀족들만을 극단적으로
총애했기 때문에 그녀의 그룹에 끼지 못한 귀족들은 그녀와 그 총신들을 향해
매일같이 악담을 퍼부었는데 베르사유 외의 다른 장소,
특히 파리에서는 이러한 정세가 심했다고 합니다.
대부분 유언비어에 불과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정세가
파리 민중들의 증오를 일으키게 되었고
이와 같이 그녀와 관련된 소동은 끊이질 않았습니다.
1789년7월 14일, 왕정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여,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였습니다.
폴리냑 백작부인 등 그동안 마리 앙뚜아네뜨로부터 비호를 받던 귀족들은 그녀를 버리고
망명해 버렸고 국왕 일가는 혁명군에 의해 포로 신세로 전락하여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리의 튈르리 궁전으로 옮겨져 그곳에 갇혀 지내면서 혁명군의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의지가 부족한 남편을 대신하여 성을 저당 잡혀 빌린 돈으로
오스트리아에 있는 오빠 레오폴트 2세에게 도움을 청하였고페르센 백작의 도움을 얻어
위조 여권을 손에 넣게되자 1791년 6월 20일 식량과 술과 옷을 가득 싣고
남편과 아이들을 비롯하여 시녀와 미용사까지 동반하여 대형 마차로
몰래 파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곧 병사들에게 신원이 발각되어서
탈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국왕 가족은 6월 25일 파리로 끌려오게 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국왕 일가는 친 국왕파 세력으로부터도 호감을 잃게되었습니다.
1792년,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하면서, 마리 앙뚜아네뜨가 적군에게 프랑스군의 작전을
몰래 알려주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8월 10일, 파리 시민과 의용군은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국왕 일가를 탕플 탑에 모두 투옥시켰습니다.(8월 10일 사건).
땅플 탑에서 유폐 생활을 하게 된 국왕 일가는 체스를 즐기거나 아이 공부를 봐주는 등
잠시나마 단란한 나날을 보내었는데 10접시 이상의 저녁식사가 제공되고
30명의 재봉사를 고용하는 등 대우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1793년 1월 21일, 혁명 재판은 루이 16세에게 사형판결을 내려
단두대에서 루이 16세는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
루이 16세의 나이 35세...
그 해 7월에는 왕위 계승자인 왕자 루이 샤를이 어머니와 고모에게서 떼어 놓아졌고
그해 8월 1일에 마리 앙뚜아네뜨는 콩시에르주리 감옥으로 이감된 뒤,
10월 초에 공개 재판을 받았고 1793년 10월 15일, 그녀는 혁명 재판으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다음날인 10월 16일, 콩코드 광장에서
남편의 뒤를 따라 단두대에서 참수 당하였습니다.
그녀의 나이 34세에...
콩시에르주리에 있는
그녀가 단두대에서 죽기 전에 거처하던 방..
화려한 베르사이유 궁전을 떠나 이곳에 갇혀 죽음을 앞두고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곳에서 그녀가 쓰던 물건들..
베르사이유 궁전의 화려함과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방 앞의 벽에 걸린 그녀에 대한 설명
굳게 닫힌 문
튼튼해 보이는 쇠창살의 창문
그녀의 방을 지키는 간수들의 모형
참수형 당일,
마리 앙뚜아네뜨는 특별 죄수로서 거름통을 싣는 짐수레에 실려
처형장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루이 16세는 그나마 마차로 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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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시에르주리 감옥에서 나올 때 그녀는 머리카락이 짧게 깎여져 있었으며
두 손은 뒤로 묶여져 있었는데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사형 집행인의 발을 실수로 밟았을 때에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라고 말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영국의 헨리 8세의 앤 왕비가 부정의 누명을 쓰고 단두대에서 처형 당할 때
마지막으로 한 말이 "오월이군요." 라고 했다더니...
죽음을 앞두고서야
그녀는 비로서 겸손해진 것일까?
단두대에서 처형할 때에는 사형수의 얼굴을 아래로 향하게 하였지만,
마리 앙뚜아네뜨의 경우는 얼굴을 일부러 위로 향하게 해서
위에서 칼날이 떨어져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게 했다는 소문이 있으나
진위는 불분명합니다.
아마도 이러한 이야기는 그 당시 그녀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증오심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역사를 잘 모르지만 부패한 왕권에 대한 민중들의 봉기인 프랑스혁명으로
왕권과 신분제도가 폐지되어 민중들이 승리한 위대한 혁명이지만
루이 16세나 그 왕비를 그처럼 처참하게 단두대에서 처형해야만 하였을까..
목을 메달거나, 차라리 칼로 찔러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칼날이 떨어져 내려와서 죽이는 너무나 비참한 사형 무기인 단두대...
그런데 단두대는 비참한 사형무기가 아니고
사형수가 제일 고통을 적게 받고 단시간에 죽게 하기 위하여 교수형이나 칼이나
도끼로 참수를 하는 방법을 폐지하고 혁명 당시에 특별 위원회에서 연구하여
특별히 고안된 것인데 그 위원회에 참여했던 Dr. Guillotine의 이름을 따서
"기요띤"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단두대 그림
어쨋든 후대 사람들은 왜 단두대에서 처형 당하는 것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라고 표현할까요?
정치나 역사를 떠나서 화려한 베르사이유 궁전과 콩시에르주리를
관광하면서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루이 16세와 마리 앙뚜아네뜨 왕비의
비참한 죽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멀리 이곳까지 왔으니 한장 찍었습니다.
이런 호화로운 궁전에서 살지는 못 해도
적어도 단두대에서 처형 될 염려는 없는 인생이니
행복하다고 해야 하는지~~~
(Adagio for violoncello based on a Hebrew melody, Op. 47)
Piano accompanist is Gerald Moore.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와 피아니스트 제랄드 무어가
연주하는 막스 브루흐의 "Kol Nidrei 신의 날"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할 때 연주하는 곡입니다.
(*표시가 있는 사진들은 인터넷에서)
2011/02/05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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