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의 꿈과 사랑과 절망과 슬픔과 고독으로 범벅이 된
예술가들의 언덕, 몽마르뜨...
Paris, France
(몽마르뜨 언덕의 테르트르 광장)
음악전집, 미술전집을 사서
밤을 세워 읽으면서 예술에 대해서 감격해 하는,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고 좋아하던 일곱 형제의 맨 큰 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언니가 흥얼거리는 오페라 아리아를 듣고
세계적인 오케스트라틀, 그리고 지휘자들의 이름을 듣고 자라서인지
내 마음 깊은 곳에는 막연하게 나마 음악과 예술에 대한
어떤 동경이 알게 모르게 자라고 있었나 봅니다.
그러나 결혼 후 사랑하는 가족과 고국을 훌쩍 떠나 이곳에 온 후
딸딸딸...낳고 키우고, 그리고...또, 그리고...
뭔가 상실한 듯한, 그러나 찾을 수 없고 회뵉될 수 없는
그리운 그 무엇 때문에 마음은 항상 방황하였지만
세월은 그러한 나의 마음을 외면한 채
이리도 빠르게 흘러버렸습니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었던, 이름만 들어도 가슴 벅찬,
파리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있다는 몽마르뜨...
그 몽마르뜨 언덕을 늦은 나이에 나마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일생 일대의 행운이었습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본 인상파 화가들, 마네 모네, 세잔느, 고갱,
고흐, 로트렉, 르노아르, 티소, 드가, 피사로, 샤반느, 등등
대부분의 인상파 화가들이 그들의 삶을 던져
예술의 혼을 불태웠다는 몽마르뜨...
그 수 많은 예술가들의 혼이,
그들이 기울이던 술잔이,
그들이 사랑하던 사람들이,
그들의 사랑의 상처가,
그들의 방황과 가난과 고독과 절망이,
그리고 그들의 이별과 죽음이,
몽마르뜨를 찾아 가는 나그네의 마음을 시리게 하고
발걸음을 무겁게 하였습니다.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의 그림
<스타킹을 올리는 여자>, 1894년
남프랑스 아르비에서 백작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부터 뼈가 약한데다가 13세에 넘어지는 사고로 성장이 멈추어 버려
150cm 가량의 키에 얼굴 모습도 볼상 사납게 이그러져 버린 로트렉,
자신을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거라는 자격지심으로
술과 매춘으로 인한 성병과 결국은 알콜중독으로 37년의
비운의 삶을 살다 간 화가 앙리 로트렉이 창녀를 사고,
술을 마시면서 수잔 발라동을 만나 동거하며
그림을 그렸던 곳이 몽마르뜨...
* 로트렉이 그린 <수잔 발라동> (image from internet)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나 서커스 단원이었던 수잔 발라동,
미혼모로 끝내 아버지를 밝히지 않은 아들 위트릴로를 낳고
드가, 로트렉, 샤반느, 르노아르 등 인상화 화가들의 모델 노릇으로
전전하다가 그 화가들의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운 수잔 발라동,
나중에는 드가의 제자로 여류화가가 되어
여성으로서 최초로 프랑스의 국립 에술원의 회원이 되었다는
수잔 발라동(Suzzan Valadon: 1865-1938)이 로트렉을 만난 곳도
몽마르뜨의 술집,
르노아르 (Pierre-Auguste Remoir: 1841-1919)
<Bal au Moulin de la Galette, 물랭 드 라 갈레뜨에서의 무도회>, 1876년, (131cm x 175cm)
수잔 발라동의 스승이었던 에드가 드가 (Edgar Degas: 1834-1917)의 그림
<After the Bath>, 1898년
가난하고 고독한 음악가,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가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빈곤한 생계를 이어갈 때
어느 술집에서 로트렉과 춤을 추던 수잔 발라동을 만나
오직 6개월의 동거 후에 헤어졌지만 죽을 때까지
그녀 만을 사랑하게 되었던 곳도 몽마르뜨...
사티의 초상화를 그려 주기도 했던 발라동은
아들 위트릴로의 친구이며 20년이나 연하의 우터를 만나
그를 모델로 <아담과 이브>를 그리고난 후 결혼을 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발라동이 아무도 찾지 않는 쓸쓸한 방에서
생을 마감한 곳도 몽마르뜨...
수잔 발라동이 그린 <아담과 이브>, 1909년
발라동이 미혼모로 출산한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가
어머니 발라동으로부터 따뜻한 사랑은 받지 못했지만
어머니의 화가로서의 재능을 물려 받고 어머니로 부터 그림을 배워서
몽마르뜨의 건물과 거리, 풍경들을 주로 그려서
"몽마르뜨의 화가"라는 칭호를 얻으며
화가로서의 이름을 날렸던 곳도 몽마르뜨...
*위트릴로가 그린
<Windmills of Montmartre, 몽마르뜨의 풍차>, 1949년
목사의 아들로 한 때는 전도자로 일하려고도 했던 빈센트 반 고흐,
결국 그는 그림에 대한 열정을 떨치지 못하고
평생 가난과 싸우며 정신적인 갈등을 겪으면서도
수 많은 그림을 그린 고흐,
그도 네델란드의 고향을 떠나 파리에 와서
남프랑스 아를로 가기 전에
잠시 로트렉과 함께 그림을 그렸던 곳도
몽마르뜨...
Vincent van Gogh (1853-1890)의 <자화상>, 1890년
그가 권총으로 자살하기 10개월 전에 그린 자화상입니다.
Paul Gauguin(1848-1903)
<Et l'or de leur corps> (And the gold of their bodies), 1901년
여성편력이 지저분했다는 폴 고갱이 작은 화실에서
줄레에트 뉴에와 동거를 한 곳도 몽마르뜨..
나중에 남프랑스 아를에서 공동 생활을 하던 고갱과의 싸움이 화근이 되어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고를 저지르기도 했고
1890년 7월 27일 파리 근교 오베르의 밀밭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하고 이틀 뒤 7월 29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37세의 나이에...
고흐는 평생 가난하여서 항상 동샌 테오가 돈을 부쳐주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는 자신의 그림 가격을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로트렉도 37세의 안타까운 나이에 신체 불구의 아들을 끝까지 돌보던
어머니에게 "어머니 당신 뿐이예요"라는 슬픈 말을 남기고
매독과 알콜 줄독(압셍트라는 독한 술중독)으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 수잔 발라동 만을 사랑했던 음악가 에릭 사티도
결국은 압셍트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죽은 후 부치지 않은 편지 한 묶음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수신인은 모두 수잔 발라동이었다고 합니다.
인상파 화가 이 후에도
피카소 등 많은 화가들의 아지트로
그들이 춤 추며 마시고 떠들고 슬퍼하고 이별하며
그들의 삶을 던져 몸부림 치던 곳,
몽마르뜨는 이렇듯
예술가들의 열정과 방황과 고독과 슬픈 죽음을 껴 안고
오늘날 많은 관광객들을 맞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몽마르뜨를 찾는 관광객들은
얼마나 이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
.
.
보블 전쟁에서 전사한 5만 8천명의 명복을 빌기 위해
몽마르뜨 언덕에 지어진 사크레 쾨르(Sacre0Coeur) 사원입니다.
많은 생명을 희생시킨 전쟁이 이런 사원을 짓게 했다니 아이로니입니다.
신부들은 전쟁의 공포와 정부군에게 학살 당한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비는
영구적인 전통을 이어 아직도 릴레이 기도를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1875년에 건축이 시작되었지만 40 여년이나 지난 1914년에야 완공되었다니
우리가 아는 많은 인상파 화가들이 활발히 활동하던 시대는
이 사원이 완공되기 전인 것같습니다.
날씨가 차가웠지만 관광객들이 많았습니다.
몽마르뜨 언덕을 찾아가는 길에 몽마르뜨 묘지를 지났는데
안타깝게도 눈발이 내린다고 묘지는 닫혀 있었습니다.
드가, 에밀 졸라, 오펜 바흐, 귀스타브 모르, 베를리오즈, 스탕달 등
화가, 문인, 음악가들의 묘가 이곳에 있다고 했는데...
몽마르뜨 언덕으로 가는 길에
이런 카페를 만났습니다.
겨울이라 눈 밭에 있는 빈 의자들이 오지도 않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과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런 곳에서 마냥
수다를 떨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사원에서 내려다 본 파리 시내입니다.
날씨가 춥고 흐려서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군요.
이곳에서 보는 일출과 일몰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합니다.
저 아래 어딘 가에 무랑 루즈(Moulin Rouge)가...
사원 앞에서 하프를 연주하는 사람,
손이 시려 손가락이 보이는 장갑을 끼고 연주하고 있습니다.
하프소리가 몽마르뜨 언덕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제법 아름답게 들렸습니다.
막내가 여행 때 사용하라고 사 준
손에 쥘 정도로 조그만 Flip-video camera로 찍어서
유투브에 올려서 가져 온 동영상입니다.
깨끗하게 잘 찍혀서 신기합니다.
사진 찍으랴, 동영상 찍으랴, 바빳습니다.
사원 옆으로 돌아서 기념품 가게들과 식당들이 즐비한 곳을 지나
조금 더 가니 지난 200 여년 동안 무명 화가들의 보금자리로 사랑을 받고 있는
테르뜨르 광장이 나옵니다.
무명 화가들의 보금자리, 테르트르 광장
많은 화가들이 날도 질척이는데 그림들을 펼쳐놓고 팔려고 하고 있고
그림을 그리거나 관광객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 주기고 합니다.
이곳에서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 화가 한 사람을 만났는데
차마 사진을 찍겠다는 말도 건네지 못했습니다.
돌아 와서 생각하니 그래도 말을 건네고
사진을 찍을 껄..."껄" 인생입니다.
이렇듯 지금도 이곳에서 무명화가들은 꿈을 꾸며
가난과 싸우며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 태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은 하루에 몇 사람이나 그리는지...
모델도 화가도 서 있네요.
이렇게 그려 주면 돈은 얼마나 받는지..
어느 화가의 권유에 못 이겨 남편은 불과 5유로를 주고 초상화 스케치 한 장을
받아 왔는데 5유로여서 그런지 그림은 형편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적어도 40 내지 50 유로를 주어야 제대로 된 초상화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언덕 아래 어딘 가에 무랑 루즈가,
그리고 화가들, 예술가들, 문인들이 좋아하는 술집, 카페들이 있다고 하는데
날씨가 추워서 빨리 날이 어두워져서 그런 곳들을 들려 보지 못했습니다.
몽마르뜨 미술관, 몽마르뜨 카페...
당시에 사랑을 받지 못하던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가 그런 카페였다고 합니다.
올라갈 때는 걸어서, 내려올 때는 케이블 카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버스나 전철, 고속전철을 탈 때 사용하는 Paris Visit Pass로
이런 테이블 카도 탈 수 있었습니다.
* 무랑 루즈
"빨간 풍차"라는 뜻의 무랑 루즈(Moulin Rouge)
공연정보를 얻으시려면
http://www.moulinrouge.fr/ 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로트렉이 물랑 루즈 홍보를 위해서 그린 포스터
화가 로트렉이 무랑 루즈를 홍보하기 위해서
1889년에 그린 포스터인데 이 포스터로 인하여
무랑 루즈는 더욱 유명해졌고 로트렉도 유명하게 되어서
당시 이 포스터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몽마르뜨 언덕 아래의 피갈이라는 지역은
역사적으로 낭만과 예술을 상징하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환락가로 변해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소매치기 등
낭패를 겪게 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프랑스인들은 무랑 루즈하면
로트렉의 비참한 삶과 에술의 혼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무랑 루즈는 로트렉의 포스터로 1889년 이래 더욱 유명해저서
세계 최고의 카바레로 당대의 인상파 화가들은 물론
그 후 프랑크 시나트라, 이브 몽당, 에디트 삐아프 등 수 많은 가수와
무희들이 스쳐 간 카바레인데
지금은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캉캉 공연, 툴루즈 로트렉 공연,
벨 에포크 공연 등이 있다고 합니다.
공연비가 만만치 않게 비싸다고는 하지만 시간을 더 내어
공연도 보고 카페나 미술관들도 찬찬히 들러 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파리에 다시 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진데...
Solveig's Song을 Anna Netrebko가 부릅니다.
예술가들은 불운해야 하는지,
그들의 고독, 슬픔, 사랑의 상처, 빈곤, 짧은 생애를 생각하니
또 마음이 아린데
"예술가들의 슬픔의 맨 밑 바닥은 가장 순수하며
슬프지 않은 강이 또 하나 흐르고 있어서
그곳에서 승화되고 정화된 예술 작품이 탄생하여
여지껏 시대를 뛰어 넘어 우리들에게 감돌을 주고 있다."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저를 위로합니다.
*표가 있는 사진은 인터넷에서 가져왔고
그리고 나머지는 오르세 미술관과 몽마르뜨에서 찍은 것입니다.
2011/02/10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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