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의 연인...
천재 여류 조각가 Camille Claudel (1864-1943)
노틀담 성당을 지나 조금 걸어서 세느강을 지나는 다리를 건너
세느강 안에 있는 생 루이섬(Ile Saint-Lous)으로 걸어갔습니다
한 때는 늪지였던 생 루이섬은 17세기에 시테섬에 연결되면서
우아한 주택가로 변모해서 역사적인 인물들이 살았었고
현재도 유명인들의 거주지라고 합니다.
이 섬에 가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베르티옹 아이스크림을 먹으라고 하던데...
너무 추워서 아이스크림은 먹을 생각도 못하고
옷 깃을 세우며 세느강변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세느강을 따라 주택들이 있는 길을 따라 걷다가
너무나 뜻하지 않게 아래의 현판이 눈에 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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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
프랑스의 천재 여류 조각가에 대한 포스팅을 위해서
그녀의 비련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까미유 끌로델>을 다시 보았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까미유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그의 타고난 천재성을 인정한 아버지의 후원을 힘입어
조각을 공부하다가 20세에 조각 "생각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로댕(Auguste Rodin)의 제자로 발탁되어 로댕이 의뢰받고 조각하기 시작한 "
지옥의 문" 등의 조각을 함께하는 조수로, 또는 그의 모델이 되기도 하며
이미 동거하는 여인과 아들이 있는 44세의 로댕을 사랑하게 되고
로댕도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보다는 로댕의 제자로서,
로댕의 제자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한 채, 그러나 그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 사랑의 단꿈을 꾸게 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로댕과 끌로델...비록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스승과 제자,
작가와 모델이라는 관계로 예술적인 경쟁심과 시기심이 배제될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로댕을 사랑하면서도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추구하고
자신만의 작가적 가치를 갖기를 원하던 까미유...
더구나 여류 조각가로서 인정을 받기가 쉽지 않았던 시대에...
어느날 그녀는 임신한 것을 알게 되고 로댕이 가족을 떠나 자신을 택하기를 원했지만
로댕은 오직 그녀만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자신의 명성과 체면때문에 가족을 버리지 못하고
까미유는 남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여자가 되어 버립니다.
너무나 실망한 까미유는 실연의 상처를 안고 로댕을 떠나,
물론 아기는 유산이 되고, 자신 만의 작품세계에 몰입합니다.
한 때는 여류조각가로서의 자신의 입지가 굳어지는 것같았는데 로댕에 대한 사랑의 상처를
쉽게 잊을 수가 없었기에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면서 서서히 망가져 가지요.
1913년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던 그녀의 아버지가 죽자 남동생과 어머니는
그녀가 혼자서는 도저히 생활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냅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30년의 세월을 보내고 1943년에 생을 마감합니다.
로댕은 그녀가 정신병원에 들어간지 4년 후, 1917년에 이미 죽었고....
그녀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까미유 끌로델>은 이렇게 그녀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것으로 영화를 끝내고 그녀의 30년 정신병원에서의 생활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녀는 정신병원에서 어떻게 보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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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그녀가 참으로 정신착란증세가 있었는가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병원에서 가족들에게 지극히 정상적인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했고
의사도 그녀를 가끔 데려가도 좋다는 연락을 가족들에게 했지만 그녀의 남동생은
해외에 주로 있었고 어머니는 너무 늙어서 그녀를 돌볼 힘이 없다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로댕박물관에는 까미유가 만든 남동생의 흉상도 있었습니다. (위의 사진)
*****
로댕박물관을 가기 위해 탄 버스를 잘못 내려서 헐레 벌떡
종종 걸음으로 찾아 간 로댕박물관...
그곳에 까미유 끌로델의 작품들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죽어서야서 사랑하던 로댕과 함께 있는 것일까요?
그녀의 "성숙의 시대"라는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녀의 작품들은 이 박물관에서 로댕의 작품들보다 더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왈츠>라는 작품입니다.
끌로델의 Clotho (1893)
그녀의 "파도, La Vague, The Wave" 라는 작품입니다.
사진으로만 보던 작품을 실제로 보니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그녀의 "수다쟁이들"이라는 작품입니다.
수다를 떤다기 보다는 여자들이 모여 뭔가 gossip거리를 소근거리는 것같습니다.
***
입구를 지나 정원에 들어서면서 왼쪽으로 로댕의 "깔레의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뒷정원에 로댕의 많은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끌로델을 생각하면 왠지 로댕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그의 작품들은 미워할 수 없어서...미워도 다시 한번...
로댕의 "깔레의 시민들"
"깔레의 시민들", 이 작품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1339-1453)의 와중에 프랑스의 북부 도시 깔레는
영국의 집중 공격으로 멸망하기 직전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방어 자체도 힘들었지만 도시민들이 먹을 식량이 부족하여 너무나
힘든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 깔레 시장의 간청으로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깔레가 누구든지 6명의 책임자를 골라서 나에게 넘긴다면 도시 전체의
학살과 파괴만은 면하게 해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이 때 깔레 최고의 부호였던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자진하여 나셨고
다른 5명의 지원자들과 함께 죽음은 물론이고 에드워드가 항복의 조건으로 말한
목에 밧줄을 두르고 맨 머리와 맨 발에 홑 옷 한벌만 걸치고 성을 나서라는
굴욕을 기꺼이 감내 했다고 합니다.
이 숭고한 희생정신, 혹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그 후
역사에서 "시민정신"의 모범이 되었고 그런 시민들을 배출한
깔레에게는 자긍심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그 사건으로부터 5백년이 지난 19세기 말 깔레市는 그들의
영웅을 청동 조형물로 남기기로 결정하고 그 조형물의 제작을
로댕에게 의뢰해서 나온 작품이 "깔레의 시민들"입니다.
전쟁의 역사가 이러한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킨 아이러니입니다.
그리고 까미유와 함께 작업한 "지옥의 문"이 있었고
빅토르 위고에 관한 포스팅에 올렸던 위고의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로댕의 "지옥의 문"
그리고 건물 뒷쪽으로 넓은 정원에 드문드문 로댕의 조각품들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정원에는 겨울이라 앙상한 가지들만 남은 나목(裸木)들이 있었지만
봄이나 여름에는 정원이 무척 아름다울 것같았습니다.
프랑스의 대 문호 빅토르 위고像
2011/02/07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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