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오르세미술관의 빈센트 반 고흐 그림들

후조 2015. 8. 3. 09:43

 

매우 심플한 디자인... Musée d' Orsay

 

 

 

 

2010년 1월, 파리에서 어떻게 찾아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드디어 우리는 오르세 미술관에 들어섰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포스터는 고흐와 고갱전을 가르키는 포스터, 

고흐와 고갱, 이들은 여기에서도 함께 있네요.

 

 

<자화상>, 1889년 9월 

 

 

방에 들어서자 마자 맨 먼저 눈을 사로잡은 그림은 고흐의 자화상,

그가 생 래미의 정신요양원에 있을 때 그린, 아마도 마지막 자화상일 것입니다.

고흐는 자신의 질병을 감지하고 자발적으로 입원하여

1년 가까이 그곳에 있으면서도 그림을 그렸습니다.

 

비록 사진 찍는라 작품 감상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고흐의 자화상 앞에서는 발길을 쉽게 떼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 때 벌써 자신의 죽음을, 자살을, 예견하고 있었을까...

 

말년의 그의 정신상태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듯한,

바라보고 있는 나까지 삼켜버릴 것같은 강이나 바다의 어느 지점에서 일어나는

whirlpool(소용돌이) 같은 푸른 색으로 일렁이는 배경 화면,

불안해 보이면서도 강렬한 눈빛, 손가락으로 빗어 넘긴 듯한 머리,

덥수룩한 턱수염, 입고 있는 낡아 보이는 여름 양복,

 

오르세에서 그의 자화상 앞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막연한 슬픔으로 가슴이 절절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

  

    

 

오르세에는 고흐의 그림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습니다.

위의 자화상과 아래의 6점의 그림만 있었습니다.

 

 

 

 

<아를의 무도회장>, 1888년 10-11월, 아를에서 그린 그림

고흐의 그림같지 않은, 고갱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그림이지만

화려한 무도회장에서의 밝아야 할 인물들의 표정은 역시 어둡습니다.

 

 

<아를의 여인, 지누 부인의 초상>, 1888년 11월, 아를에서

 

 

지누부인은 고흐가 아를에 처음 왔을 때 묵었던 카페 라가르의 주인으로

고흐에게 많은 도움을 배풀었기에 고흐가 항상 고맙게 여긴 여인입니다.

고갱은 이 여인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렸지요. 

고흐와 고갱의 갈등의 시작...

 

 

<낮잠>, 1889-1890년, 아를에서 그린 그림

 

유럽에서는 점심후 두시간쯤 (오후 1-3시, 혹은 12-2)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고 시에스타를 즐기더군요.

농부들의 낮잠, 너무나 달콤해 보입니다.

 

 

<오베르의 교회>, 1890년 6월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고흐도 전도사로 사역한 적이 있지만 복음에 대한 그의 순수함은

교회의 권위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고 고흐는 사역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낮에 그린 것같으면서도 어둠이 있고 교회의 모양을 뒤틀려지게 그려서

혼돈스럽게 보입니다. 전도사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그의 암울한 심정을 나타낸 것인지...

 

 

<Thatched Cottages at Cordeville>, 1890년 5-6월

오베르에서 그린 그림

 

닥터 가셋의 초상화, 1890년 6월

 

 

고흐의 의사였던 폴 가셰의 초상화입니다.  1890년 5월 17일,

고흐는 생 리미에서 나와 파리에 잠간 갔지만 다시 파리의 북쪽에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가서 마지막 생을 마감합니다.  이곳에서 만난 닥터 가셋의 초상화를

여러점 그렸는데 맨 처음 초상화는 고흐의 그림 중에서 가장 비싼 가격으로 팔렸다고 합니다.

 

 

"닥터 가셰는 어딘지 아파 보이고 멍해 보인다.

그는 나이가 많은데 몇년 전에 아내를 잃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의사인데다 일과 신념이 그를 잘 지탱해 주는 것같다.

닥터 가셰는 이 초상화를 아주 좋아해서 가능하면 똑같은 걸 하나 더 그려서

자기에게 줄 수 없겠냐고 했다. 나도 그럴 생각이다.

그는 <아를의 여인>도 좋아한다.  너도 그걸 분홍색으로 그린 습작을 가지고 있지.

닥터 가셰는 이 두 그림의 습작을 보기 위해

이따금 들르곤 했는데 습작도 무척 좋아한다."

-고흐가 테오한테 보낸 편지에서-

 

 

   *****

 

 

 자화상과 위의 6점의 그림들은 고흐의 말년에 아를과 오베르에서 그린 작품으로

고흐를 대표할 만한 그림일지라도 고흐의 초기의 작품들도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 3.30. - 1890. 7.29.)

 

누구나 잘 아는 고흐에 대해서 새삼 이야기한다는 것이 민망스러울 정도로

너무도 많이 알려진 그의 짧은 생애와 불행한 죽음..  37의 젊은 나이에, 오베르에서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7월 27일,

권총으로 자신을 쏘아 피를 흘리고 돌아 온 자신의 집에서

이틀 후에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최근에 고흐의 죽임이 타살이라는 설도 나왔지만...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그래서 더욱 소심하면서도 진지하고,

광산촌에서 가난한 자들을 대변하여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던 사람,

슬픔이 기쁨보다 낫다고 설교한 신앙적인 사람,

그러나 그의 진심은 교회의 권위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 버리고,

 

그 어둠의 터널에서 그가 붙잡은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

전문적인 공부를 한 적도 없다는데, 화법도 몰랐다는데, 그는

열정적으로 우울증, 광기, 간질, 망상 등과 싸우면서도

지칠줄 모르고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고흐는 일생을 가난하게 살아서 가난에 너무 익숙해져서 언제나 그의 그림의 소재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광부들, 노동자들, 직조공, 넝마주의, 감자를 캐는 사람들, 창녀 시엔, 낡은 신발, 무료급식소, 등등

그러나 아무리 가난에 시달려도  팔기위해 흥미 위주의 그림은그리지 않은 고흐,

 

그림에서 감상적이고 우울한 것 보다는

뿌리 깊은 고뇌를 표현하고 싶어한 고흐,

파리시대 이전에 그린 그림을 보고 싶었는데

오르세에는 아쉽게도 그런 그림은 한 점도 없었습니다.

 

시골 목사인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기에, 부모가 자기를 개처럼 여긴다고 생각하면서도 황야의 오솔길에 서 있는 아버지를, 또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을 풍경 속에

서로 팔을 끼고 있는 다정한 모습을 그림에 담고 싶어한, 부모의 애정에 목말라 한 고흐,

 

정신질환으로 입원했던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도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던 비운의 화가,  정신이 돌아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상처많은 인생,  가난하고 슬픈 영혼,

그는 분명히 천재인지 광인인지,

천재이었기에 그토록 미쳐버렸는지,

미쳐버렸기에 천재로 여겨졌는지...

 

이 지구상에 오직 그림을 위해 태어난 사람,

그러나 끝내 권총으로 자살...

그것을 <운명>이라고 해야 하는지...

빈센트 반 고흐는 왠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립니다.

(왼쪽의 그림들은 인터넷에서) 

 

이러한 고흐를 이해하며 형의 그림이 훌륭하다고 격려하며 끝까지 돌봐준 사람은 동생 테오,

생 래미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조차도 희망을 가지라며

"형의 불행은 분명 끝날 거야"라고 형을 위로했던 사람은 오직 동생 태오였습니다.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으면 그가 만일 화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작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경은 물론 세익스피어나 빅토르 위고, 등 고전적인 책을 많이 읽은 고흐는  

언제나 작업을 하고 있는 그림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 하며 

그의 마음을 진솔하게 동생에게 편지로 전했스습니다.

 

경제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너무 미안해 하고, 동생을 염려하고,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동생마저 형 고흐가 죽고 6개월 만에 죽었다니

동생 테오라도 좀 더 살았더라면...하는 아쉬운 마음이

고흐를 생각할 때마다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생전에 오직 한점의 그림, <붉은 포도밭>이 4백프랑에 당대의 벨기에의 화가

 Anna Rosalie Boch(1848-1936)에게 팔렸었고 그림이 팔리지 않아

동생 테오의 도움을 받고 살면서 자기 그림이 팔리지 않는 것에 대해 너무나 안타까워하던 고흐,

 

그래서 항상 동생에게 신세지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버림받고, 매춘녀를 도와주고,

가난과 질병으로 싸우던 고흐인데 그가 죽은지 11년 후 파리에서 71점의 그림이 전시된 후

그의 명성이 급속도로 커졌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900 여점의 그림들과 1100 여점의 습작들을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에

그렸다고 하니 그가 자살하지 않고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니 애당초

고흐라는 화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서양 미술사는 어떠했을까...

 

지금은 그의 그림 값이...

인프레이션을 적용한 미국의 consumer price index (2012년 3월)에 의한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의 가격 리스트를 보니

그 중에 7점이 고흐의 작품이네요.

(wikipedia 참조)

 

<Portrait of Dr. Gachet, 의사 가셋의 초상화> (1890):  $146.5 million (5위),

 

<Portrail of Joseph Roulin, 우체부 조셉 룰랭의 초상화> (1889):  $108 million (10위), 

 

<Irises, 붓꽃> (1889):  $107.2 million (12위),

 

<Protrait de L'artiste sans barbe, 턱수염이 없는 자화상> (1889):  $100 million (15위)

 

<A Wheatfield with Cypresses, 싸이프레스가 있는 밀밭> (1889):  $90.7 million (19위)

 

<Vase with Fifteen Sunflowers, 해바라기 정물> (1888):  $81.2 million (27위)

 

<Peasant Woman Against a Background of Wheat, 밀밭을 배경으로한 여인> (1890):  $67.9 million (38위)

 

 

해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만 하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화가들의 그림 값...  

지구가 멸망하는 그 날에는 이 모든 것들은 어떻게 될까? ㅋㅋ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트리오...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 2악장입니다.

Symphony No. 5 in C minor, Op. 67 2nd movement

Andante con moto

 

 

고흐의 그림을 올리면서 무슨 음악을 올릴까 고심하면서

혹시 그의 편지에 음악에 대한 언급이 있는지를 살펴 보니,

 

"이따금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아직도 내 안에는 평온함, 순수한 조화, 그리고 음악이 존재한다. 

나는 이것을 가장 가난한 초가의 가장 지저분한 구석에서 발견한다."

(1882년 7월 21일의 편지에서)

라고 언급한 구절은 있었지만

음악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는 것같았습니다.

 

 그 당시 음악은 아무래도 귀족들의 전유물이었기에

가난했던 고흐는 음악을 좋아할 여력도 없었을까? ㅋㅋ

 

그러나 그가 음악을 좋아했다면 누구의 음악을 좋아했을까,

모짜르트, 베토벤, 아니 슈베르트, 슈만?

모짜르트보다는 베토벤을, 슈베르트보다는 슈만을 더 좋아했을 것같은데...

 

고흐를 생각하니 베토벤이 생각났습니다.

아, 토벤 아저씨도 고흐 시대를 살았다면

고흐의 그림을 좋아했을까...

 

 

2012/09/27 09:20 

 

 

 

 

리나아  

고호와 고갱의 그림을 보면서 9월의 마지막 주에..바야흐로
추석 준비에 돌입해야할 시점에 와 있네요...^^
저 황금벌판에서의 낮잠 이 너무 좋아집니다 .
이 가을의 황금빛 논 풍경이 그려집니다. 어디론가 한적하고
공기좋은 곳으로 달려가 어서 가을을 느끼고 싶어요..  2012/09/27 13:32:39  

     
     
 

 

士雄  

저 위에 낮잠이라는 두 남녀가 성경 룻기의
어느 한 장면과도 같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인가요.
내 생각이 맞다면,,
성경은 이들의 후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했다고 하지요. ㅎㅎ 2012/09/27 14:24:04  

     
     
 

 

딱따구리  

저 위의 초상화를 얼마나 계속 보고 있는지 모르시죠?..
몇번이나 말을 하려다가도 막상 그 수많은 말이 안 써지는 거..
님께서는 아실 듯요..그는 정말 너무도 위대한 인간이었어요.
인간의 영혼이 결국은 승리할 거라는..
꼭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도 저는 그렇게 이해되어져요..

여기도 11월에 고호전이 있는데 좋은 안내가 될것 같아요..
그에대해선 정말 해도 해도 모자랄 스토리이고요..
저의 추석은 고호로 가득차서 암것도 못하고요..
여기선 파리시대의 것만 전시된다는데
저 위의 자화상은 못오는 것이 아닌지..1888년도작 까지 전시된다니..
모두들 너무 할 말이 많아서
외려 아무말도 못하지 싶어요...
위대한 영혼 고호....요...
그리고 그의그 모든 서신들을 대충 들어도..그리고 님의 그 전 포스팅..

옛날부터도 전 그를 쏜 것은 그의 병마이지
그 자신은 아니라고 믿기에..
그래서 사건 후 이틀은 본정신의 고호가 회.와 개를 이루는
신의 축복된 시간이라고 믿었지요... 2012/09/28 22:17:39  

     
     
 

 

멜라니  

반 고흐..
그의 타살설이 나왔을 때.. 저는 내심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남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도 너무나 슬픈 일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가 자신을 죽였다는 것은 그 뭐라 말할 수 없는 불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딱따구리님 말씀처럼 저도
그의 마지막 이틀은
그와 하나님과의 은밀한 시간이었다고는 믿었지만..
제가 사랑하는 고흐가 자신을 죽였다는 것은 차마 가슴이 아파서
그 대목만 나오면 피했었습니다.

타살설..
악동들의 실수이든,, 악의에 찬 행동이었든..
그들의 행동을 감싸주었다는 추론을 들었을 때.. 저는
정말 고흐다운 행동이다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고흐의 그림은..
맨 정신으로 대하기가 참 힘듭니다.
깊고, 외롭고, 슬픈 고독이 막 뚝뚝 떨어지는 듯 해서요..
거기다 오버럽되는 그의 슬픈 삶..
참 좋아하지만.. 저 자신이 너무 다운되는 것 같아
일부러 피하기도 하는 고흐의 그림들..
하지만, trio님의 잔잔한 설명을 들으며 잘 감상했습니다.
 2012/09/29 12:48:50  

     
     
 

 

나를 찾으며...  

화가 고흐의 원작들은 이상케 떨림이 강하더군요.
예술의 전당에서 본 그 화가의 작품!!
마치 그 작품 주변에 그가 서 있는 것 아닌가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았어요. 직접 본 그의 그림은 여타 다른 화가들하곤
색감이 완전 다른 느낌두요~^ 2012/10/03 09:4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