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심플한 디자인... Musée d' Orsay
2010년 1월, 파리에서 어떻게 찾아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드디어 우리는 오르세 미술관에 들어섰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포스터는 고흐와 고갱전을 가르키는 포스터,
고흐와 고갱, 이들은 여기에서도 함께 있네요.
<자화상>, 1889년 9월
방에 들어서자 마자 맨 먼저 눈을 사로잡은 그림은 고흐의 자화상,
그가 생 래미의 정신요양원에 있을 때 그린, 아마도 마지막 자화상일 것입니다.
고흐는 자신의 질병을 감지하고 자발적으로 입원하여
1년 가까이 그곳에 있으면서도 그림을 그렸습니다.
비록 사진 찍는라 작품 감상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고흐의 자화상 앞에서는 발길을 쉽게 떼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 때 벌써 자신의 죽음을, 자살을, 예견하고 있었을까...
말년의 그의 정신상태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듯한,
바라보고 있는 나까지 삼켜버릴 것같은 강이나 바다의 어느 지점에서 일어나는
whirlpool(소용돌이) 같은 푸른 색으로 일렁이는 배경 화면,
불안해 보이면서도 강렬한 눈빛, 손가락으로 빗어 넘긴 듯한 머리,
덥수룩한 턱수염, 입고 있는 낡아 보이는 여름 양복,
오르세에서 그의 자화상 앞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막연한 슬픔으로 가슴이 절절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
오르세에는 고흐의 그림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습니다.
위의 자화상과 아래의 6점의 그림만 있었습니다.
<아를의 무도회장>, 1888년 10-11월, 아를에서 그린 그림
고흐의 그림같지 않은, 고갱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그림이지만
화려한 무도회장에서의 밝아야 할 인물들의 표정은 역시 어둡습니다.
<아를의 여인, 지누 부인의 초상>, 1888년 11월, 아를에서
지누부인은 고흐가 아를에 처음 왔을 때 묵었던 카페 라가르의 주인으로
고흐에게 많은 도움을 배풀었기에 고흐가 항상 고맙게 여긴 여인입니다.
고갱은 이 여인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렸지요.
고흐와 고갱의 갈등의 시작...
<낮잠>, 1889-1890년, 아를에서 그린 그림
유럽에서는 점심후 두시간쯤 (오후 1-3시, 혹은 12-2)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고 시에스타를 즐기더군요.
농부들의 낮잠, 너무나 달콤해 보입니다.
<오베르의 교회>, 1890년 6월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고흐도 전도사로 사역한 적이 있지만 복음에 대한 그의 순수함은
교회의 권위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고 고흐는 사역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낮에 그린 것같으면서도 어둠이 있고 교회의 모양을 뒤틀려지게 그려서
혼돈스럽게 보입니다. 전도사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그의 암울한 심정을 나타낸 것인지...
<Thatched Cottages at Cordeville>, 1890년 5-6월
오베르에서 그린 그림
닥터 가셋의 초상화, 1890년 6월
고흐의 의사였던 폴 가셰의 초상화입니다. 1890년 5월 17일,
고흐는 생 리미에서 나와 파리에 잠간 갔지만 다시 파리의 북쪽에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가서 마지막 생을 마감합니다. 이곳에서 만난 닥터 가셋의 초상화를
여러점 그렸는데 맨 처음 초상화는 고흐의 그림 중에서 가장 비싼 가격으로 팔렸다고 합니다.
"닥터 가셰는 어딘지 아파 보이고 멍해 보인다.
그는 나이가 많은데 몇년 전에 아내를 잃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의사인데다 일과 신념이 그를 잘 지탱해 주는 것같다.
닥터 가셰는 이 초상화를 아주 좋아해서 가능하면 똑같은 걸 하나 더 그려서
자기에게 줄 수 없겠냐고 했다. 나도 그럴 생각이다.
그는 <아를의 여인>도 좋아한다. 너도 그걸 분홍색으로 그린 습작을 가지고 있지.
닥터 가셰는 이 두 그림의 습작을 보기 위해
이따금 들르곤 했는데 습작도 무척 좋아한다."
-고흐가 테오한테 보낸 편지에서-
*****
자화상과 위의 6점의 그림들은 고흐의 말년에 아를과 오베르에서 그린 작품으로
고흐를 대표할 만한 그림일지라도 고흐의 초기의 작품들도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 3.30. - 1890. 7.29.)
누구나 잘 아는 고흐에 대해서 새삼 이야기한다는 것이 민망스러울 정도로
너무도 많이 알려진 그의 짧은 생애와 불행한 죽음.. 37의 젊은 나이에, 오베르에서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7월 27일,
권총으로 자신을 쏘아 피를 흘리고 돌아 온 자신의 집에서
이틀 후에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최근에 고흐의 죽임이 타살이라는 설도 나왔지만...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그래서 더욱 소심하면서도 진지하고,
광산촌에서 가난한 자들을 대변하여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던 사람,
슬픔이 기쁨보다 낫다고 설교한 신앙적인 사람,
그러나 그의 진심은 교회의 권위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 버리고,
그 어둠의 터널에서 그가 붙잡은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
전문적인 공부를 한 적도 없다는데, 화법도 몰랐다는데, 그는
열정적으로 우울증, 광기, 간질, 망상 등과 싸우면서도
지칠줄 모르고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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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고흐를 이해하며 형의 그림이 훌륭하다고 격려하며 끝까지 돌봐준 사람은 동생 테오,
생 래미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조차도 희망을 가지라며
"형의 불행은 분명 끝날 거야"라고 형을 위로했던 사람은 오직 동생 태오였습니다.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으면 그가 만일 화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작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경은 물론 세익스피어나 빅토르 위고, 등 고전적인 책을 많이 읽은 고흐는
언제나 작업을 하고 있는 그림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 하며
그의 마음을 진솔하게 동생에게 편지로 전했스습니다.
경제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너무 미안해 하고, 동생을 염려하고,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동생마저 형 고흐가 죽고 6개월 만에 죽었다니
동생 테오라도 좀 더 살았더라면...하는 아쉬운 마음이
고흐를 생각할 때마다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생전에 오직 한점의 그림, <붉은 포도밭>이 4백프랑에 당대의 벨기에의 화가
Anna Rosalie Boch(1848-1936)에게 팔렸었고 그림이 팔리지 않아
동생 테오의 도움을 받고 살면서 자기 그림이 팔리지 않는 것에 대해 너무나 안타까워하던 고흐,
그래서 항상 동생에게 신세지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버림받고, 매춘녀를 도와주고,
가난과 질병으로 싸우던 고흐인데 그가 죽은지 11년 후 파리에서 71점의 그림이 전시된 후
그의 명성이 급속도로 커졌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900 여점의 그림들과 1100 여점의 습작들을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에
그렸다고 하니 그가 자살하지 않고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니 애당초
고흐라는 화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서양 미술사는 어떠했을까...
지금은 그의 그림 값이...
인프레이션을 적용한 미국의 consumer price index (2012년 3월)에 의한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의 가격 리스트를 보니
그 중에 7점이 고흐의 작품이네요.
(wikipedia 참조)
<Portrait of Dr. Gachet, 의사 가셋의 초상화> (1890): $146.5 million (5위),
<Portrail of Joseph Roulin, 우체부 조셉 룰랭의 초상화> (1889): $108 million (10위),
<Irises, 붓꽃> (1889): $107.2 million (12위),
<Protrait de L'artiste sans barbe, 턱수염이 없는 자화상> (1889): $100 million (15위)
<A Wheatfield with Cypresses, 싸이프레스가 있는 밀밭> (1889): $90.7 million (19위)
<Vase with Fifteen Sunflowers, 해바라기 정물> (1888): $81.2 million (27위)
<Peasant Woman Against a Background of Wheat, 밀밭을 배경으로한 여인> (1890): $67.9 million (38위)
해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만 하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화가들의 그림 값...
지구가 멸망하는 그 날에는 이 모든 것들은 어떻게 될까? ㅋㅋ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트리오...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 2악장입니다.
Symphony No. 5 in C minor, Op. 67 2nd movement
Andante con moto
고흐의 그림을 올리면서 무슨 음악을 올릴까 고심하면서
혹시 그의 편지에 음악에 대한 언급이 있는지를 살펴 보니,
"이따금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아직도 내 안에는 평온함, 순수한 조화, 그리고 음악이 존재한다.
나는 이것을 가장 가난한 초가의 가장 지저분한 구석에서 발견한다."
(1882년 7월 21일의 편지에서)
라고 언급한 구절은 있었지만
음악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는 것같았습니다.
그 당시 음악은 아무래도 귀족들의 전유물이었기에
가난했던 고흐는 음악을 좋아할 여력도 없었을까? ㅋㅋ
그러나 그가 음악을 좋아했다면 누구의 음악을 좋아했을까,
모짜르트, 베토벤, 아니 슈베르트, 슈만?
모짜르트보다는 베토벤을, 슈베르트보다는 슈만을 더 좋아했을 것같은데...
고흐를 생각하니 베토벤이 생각났습니다.
아, 토벤 아저씨도 고흐 시대를 살았다면
고흐의 그림을 좋아했을까...
2012/09/27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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