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 마비의 불운을 이기고 왼손으로 재기한
한국화가 산동 오태학(山童 吳泰鶴) 화백이야기...
사람에게 어느 지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유기체적인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각 지체의 어느 기관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특히 예술가들에게는 그들의 예술창작을
위하여 더 소중하게 여겨야할 지체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樂聖 베토벤이 청각을 잃었던 사실을 기억합니다.
작곡자에게 청각은 그 어떤 기관보다 중요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어떤 피아니스트는 손가락을 다쳐서 피아노를 더 칠 수 없게 된
경우도 있어서 왼손으로만 피아노를 치거나 다섯 손가락 대신에
네손가락으로만으로 피아노를 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화가에게 가장 귀한 지체는 무엇일까요?
충청도 부여 태생의 산동 오화백(1938년생, 중앙대 명예교수)은
홍익대 3학년 재학 중 국전에서 특선을 차지했고 24세에는 국전 추천작가로
일찍부터 화단의 주목을 받아왔고 이당 김은호에서 운보 김기창에 이르는 정통화단의 계승자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화단의 큰 인물입니다.
화단에서 많은 유명한 제자들을 길러낸 것은 물론이고
특히 80년대부터 석채작업, 일명 지본암채를 처음으로 시도한 화가라고 합니다.
관리에 따라 천년 이상 보관할 수 있다는 지본암채는 색이 있는 암채분말(색깔 있는 돌가루)로
채색하는 그림입니다. 화선지를 여러 겹 발라 장지와 같은 두꺼운 배지를 만든 후
원색의 암채분말로 색칠하고, 날카로운 송곳 같은 기물로 예리한 선획을 구사해서
이미지를 구현하는 방법입니다.
암채분말은 색깔마다 다른 나라에서 구해야 할 정도로 매우 희귀하며 高價라고 합니다.
"한국 미술은 흙의 문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나는 그런 문화의 토양에서 자랐고, 문화를 재현하려고 추구해왔다”라고 말하는 오태학화백...
80년도 초에 산동 오화백님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고 그분을 이곳 LA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그림을 접했을 때 동양화(한국화)이지만 이제까지는 전혀 보지 못했던
그의 화풍에 신선한 충격을 느꼈었습니다.
그의 호가 산동(山童)..
"천렵"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발가벗은 아동들이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노는 그림
화가는 어릴 적부터 낚시와 물고기를 좋아했기에 그는 바닷가에서 발가벗고 노는 아이들,
물고기들, 낚시하는 모습들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아동들의 그림은
보는 이들을 한없이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아련한 어린 시절이 그리워지게 합니다.
동양화라면 그저 관념산수화 정도만 알았고 관념산수화는 어쩐지 고리타분하게 여겼었는데
동양화풍으로 이런 그림들을 그리다니...
그의 山童이라는 호가 얼마나 친근하게 느껴졌었는지 모릅니다.
"천렵"
제가 산동 오태학님을 이곳 미국에서 만난 것은 1982년도 정월 초였습니다.
그의 그림과 도자기를 처음으로 전시하기 위해 이곳 LA를 방문한 그는 엘에이의 교민사회가
문화적인 면에 너무나 관심이 없는 것에 괭장히 실망을 하고 계셨습니다.
거의 30 여년이 지난 지금은 교포사회가 많이 성장하여서 문화적인 관심도 많이 달라졌지만
그 당시만 해도 교민들은 이민생활을 정착하기에 급급하여 한 점에 몇 천불씩 하는 그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분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일찍 자리를 잡은 교민들은 한국에서는 너무 비싸서 고위층들이나 즐기는 골프가
이곳에서는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기에 그러한 운동에 취미를 쏟을지언정
문화적인 면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일찍부터 알던 분도 아니고 단지 그림에 관심을 조금 가지고 있던 젊은 시절...
그저 평범한 주부였던 제가 겁도 없이 화백님을 찾아가 마침 집에서 열릴 파티에 초대하였더니
사양하지 않으시고 저희 집을 기꺼이 방문해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화백님은 그 당시 그래도 자리 잡고 사시던 50 여명의 교포들에게
문화와 예술에 대한 강의를 약 1시간여 동안 진지하게 강의해 주셨습니다.
하나의 사과를 그리기 위해 그 사과가 다 썩어질 때까지 관찰하신다는 말씀은 아직도 기억이 됩니다.
강의를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시면서 손님들과 많은 담화를 나누시고 돌아가시면서
초대하여 준 것에 대하여 너무나 고마워하시고 실망스러웠던 교민사회에 대해서도
희망을 가지고 귀국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귀한 선물까지 주시면서...
"구구리"
그러나 그 후 사는게 바빠서 저도 문화와는 거리가 먼 세월을 흘려보내고 있었는데
언젠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화백님이 쓰러져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제 삼자를 통해서 듣고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냥 오늘날까지
무심히 세월을 보냈습니다.
최근에 블로깅을 하면서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많은 포스팅들을 보면서
화백님 생각이 나서 인터넷을 검색하여보니 뜻 밖의 희소식,
왼손으로 재기하셨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감사한 일인지...
1999년 7월2일, 중앙대 부총장직을 맡고 있던 그는 강원도 고성에서
짧은 휴가를 보내던 중에 혼자 며칠간 작업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냇물에 막 낚시를 드리웠다가 뇌출혈로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 뒤 한 달 반만에 의식을 회복했지만 몸은 이미 반신불수..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사실에 좌절보다는 분노가 앞섰고
닥치는 대로 원망하고 욕을 퍼부어 봤지만 허사였다고 합니다.
화가로의 삶의 전부였던 오른손...
“처음엔 죽고 싶었습니다.
한 주먹씩 주는 약도 먹지 않아 혈변·혈뇨를 보았어요.
그 모든 화풀이와 투정은 죄없는 아내 몫이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집을 나가려 했고요.
내 인생은 모두 오른손으로 이뤄졌는데
왼손으로 오점을 남길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양립이 어려운 채색과 수묵에서 모두 일가를 이룬 유일한 화가이며
그림 속 천진한 어린이들처럼 꾸밈이 없어 시세 편승과 타협을 모르는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한 산동,
절망의 늪에서도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지만
몸이 뜻대로 움지여 주지 않기에 점점 대인관계도 기피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제자들 40 여명이 사고 직후부터 4명 1조를 이루어
은사의 굳은 몸을 24시간 주무르는 노고를 자청했고 운동도 제자들이 주도하여
휳체어에 산동을 태워 바깥으로 나와서 걸음을 걸렸다고 합니다.
첫날 100 미터를 20분에 걷고는 사제가 모두 눈시울을 적셨다는 기사를 읽으며 저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제자들인지...
'사은의 간호'와 무엇보다도 제자였다가 17년 연상의 교수와 결혼한 아내,
그 아내의 눈물과 정성어린 간호 덕분에 몸은 조금씩 풀렸고
고집스럽던 산동의 마음도 함께 열려서 치료에 박차를 가해서 용하다는 의원도 백방으로 수소문했고
중국으로 건너가 침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그러나 오른손은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아까운 시간을 계속 허비할 수는 없어서 침을 맞기위해 건너 간 중국에서
마지막으로 돌아오자 마자 그는 사고 후 처음으로 붓을 잡았습니다.
왼손으로라도 그림을 그리기위해서...
"풍어"/1994/33.4 x 24.2/지본암채
"분노를 삭이니, 왼손이 보였다"
“움직여야 살고, 살아야 그림을 그린다”
"화가는 그림을 그려야 사는거야, 왼손으로라도 그려야지..."
"현실을 인정하고 환경에 순응하자."
고집불통인 산동이 왼손에 새로운 인생을 거는데만 2년이 걸린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2년의 세월이 흐른 뒤 운보갤러리 개관전에 사고 후 첫 작품을 냈다고 합니다.
이전의 세련된 맛은 덜해도 더 순수해졌다는 평을 받았고
자신감보다는 겸손함이 배어 있다는 말들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왼손 창작의 고통을 모릅니다.
작업이야 종일 하는 일이지만 왼손이 생각과 달리 자꾸 무너집니다.
힘도 너무 들어 10분 일하고 한 두시간 쉬어야하고
왼손을 긴장해서 쓰다보면 마비된 오른손과 다리가 강직(强直)되고
이내 몸 전체가 굳어져서 몸이 풀릴 때까지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자연히 암채를 반복해서 색을 올리는 채색화뿐입니다.
수묵은 일필(一筆)이 불가능해 당분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화가의 왼손...
오른 손의 불구를 극복하고 왼손으로 재기에 성공한 예술가의 혼과
스승의 재기를 도왔던 제자들은 물론 내조자, 아내의 사랑과 헌신에 경의와 찬사를 보냅니다.
PS: 산동 오화백님의 소식을 인터넷에서 접하고
너무나 놀라서 화백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인터넷 글을 기초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1982년 1월에 Los Angeles에서 뵈었던 Mrs. Lee입니다.
이 포스팅을 허락도 받지 않고 올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부디 건강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서울에 나가는 기회가 있으면 꼭 찾아 뵙고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http://www.arko.or.kr/home2005/bodo/sub/forest.jsp?idx=1590&pidx=1500
이 포스팅을 한 후에 읽은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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